지난호 보기
햇빛, 모래 언덕, 호텔 카리스 그리고 백하은 사장
햇빛이 이렇도록 찬란한 5월에는 아무하고도 약속을 말아야 한다. 지난달에도 몸살을 앓았다. 그래. 미열에 들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지 않았느냐. 모란은 이런 날에 제 잎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몽롱한 것이 좋아.
그리고 얼마 뒤, 사막을 가는 사람처럼 온몸이 차츰 열에 달구어져 이런 헛소리를 지껄인 것 같다. 서방(西方) 지나 노을 아래 낙타 발자국이 찍혀 있고 승냥이 울음인지, 바람 소리인지, 여인숙 벽 뒤에서 소리가 난다. 구불구불한 길 위에, 누구의 얼굴같이 생긴 둥근 달이 떠가는 쪽도 서쪽 하늘이다.
건달처럼 차 문을 닫고, 건달처럼 옆방에 앉아 기다리는데 호텔 카리스의 여사장은 좀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햇빛 때문에 타고 간 자동차가 자꾸 비틀거렸고, 그 때문에 여사장과의 약속이 조금 늦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일어설까. 알베르 카뮈는 알제의 햇빛에 대해 뭐라고 썼던가.
그러나 늦은 것은 죄다! 그러니까 그 벌을 먹어야 한다. 한참 만에 큰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면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 이쁘게 시침을 떼면서 키가 늘씬한 여자 하나가 문을 민다. 하은! ‘순 한글 이름이니까 쓰고 싶으면 河銀이라고 써도 좋고, 霞銀이라고 해도 좋다면서’ 멋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을 인쇄한 황금색 명함을 내민다. 백하은 씨. 미녀는 아니다. 그러나 눈동자가 초저녁별처럼 반짝이고 총명해 보인다.
“전 20일인 줄 알았는데요.”
아아,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여자는 죄가 없는 것이다.
“미리 전화를 했….”
같이 간 편집장도 난처한 듯 표정으로만 이런 말소리를 만든다. 양쪽이 다 무엇인가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약속 날짜를 잘못 알아 다른 일을 보느라고 화장도 의상도 제대로 못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
그러나 여자는 아름답고 건강해 보인다. 한 묶음으로 동그랗게 머리를 뒤로 모아 무슨 망 같은 것을 씌운 머리, 야무지고 당차 보이면서도 어딘가 한 구석 선해 보이는 얼굴. 그것은 아주 미미하게, 거의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 눈 꼬리가 아래로 쳐져 내려간, 그런 인상이어서일 것이다. 또 햇빛처럼 아무 가식 없이 아주 크게 입을 열고 자주 웃는, 그 좋은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더구나 짧게, 짧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 풍부한 표정들이라니! 화장을 안 한 그 맨 얼굴 표정들이 풍기는 잘 익은 과일 냄새. 자두 알들이 가득 담긴 과일 바구니! 사십 중반이 다 된 여자의 매력이 사람을 또 이렇게 사로잡는 것이다. 그렇다. 내면의 많은 느낌들을 싱싱하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은 아마 호텔 여사장이어서일 게다. 그런 방법, 그런 카리스마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또 알고 있겠지.
“궁금하세요? 직업이 어느 정도 성격을 바꾸어 놓는 게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워낙 타고 난 것이 그렇기도 하지만….”
호텔 카리스, 그리고 백하은 사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흔한 호텔의 이미지 때문에도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경제적 수완도 있어야 할 것이고, 밤의 세계를 이기고 누를 수 있는 완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수많은 시비와 유혹과 곡절을 감내할 수 있는 의지도 있어야 할 것이다. 백하은 씨는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무궁화 4개 짜리의 호텔 사장이 되었을까.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모 대학 사범대 교육과를 나와서 선생이 아닌, 인천시 계양구의 호텔 카리스, 거기 사장이 된 것은 남편과 하느님 힘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 공대 출신이면서도 금융과 경제 방면 베테랑 전문가가 된 남편과, 조폭(組暴) 하나 얼씬 못하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상상이라고 여사장은 말한다. 실제 이 호텔 주변에 그런 폭력의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여자가 가지고 있던 애초의 꿈이 한데 합쳐져 호텔 사장으로 밀어 올린 것이다. 그것이 다른 한편 전주(全州) 여자를 인천 사람으로 만든 까닭도 되고.
백하은 씨는 부친의 엄명에 따라 억지로 걸었던 선생의 길이 못내 싫어서 대학을 졸업하자 서울의 다른 대학 관광대학원에 진학했다. 상과가 적성에 맞았던 여자는 그제야 비로소 구미가 당기는 호텔 경영학을 배운 것이다. 그 후 워커힐에서 연회 예약 지배인으로 5, 6년, 몇 군데 대학에 시간 강사, 그리고 하느님이 자꾸 이리로 이끌어 어찌어찌 이 호텔을 인수하기에 이른 것. 그때가 2000년 4월. 좀 돌아오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고 행복했다.
그런 까닭에 호텔 카리스에는 가끔 하느님이 와 묵으시는 것이다. 오늘처럼 눈부신 햇빛으로 오시고, 어느 날은 빗방울로, 어느 날은 미풍으로 오신다고 한다. 그 분과는 거리가 먼 건달 같은 사람에게도 지극히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느껴진다. 호텔 옥상에서, 지하실 계단에서, 커피숍 구석 자리에서, 하느님의 뒷모습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여자의 백금 귀고리나 자유가 눈금의 좌우를 넘어 다니기 때문에, 드문드문 충돌을 하기도 하고 갈등도 겪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그녀의 든든한 매니저이자, 스폰서이시다.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시는 분. 은사(恩賜)를 뜻하는 ‘CHARIS’가 이 호텔의 이름이 된 것은 그런 연유다.
이런 긴 이야기를 하면서 내내 여자는 참으로 묘한 카리스마를 내보인다. 남의 이야기는 골라서 못 알아듣는 재능, 특별한 달란트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이라도 사(邪)가 있어서가 아니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사진가는 호텔 어딘가를 헤매 다니다 와서 여사장에 대해 ‘열심, 검소’라는 칭찬의 말까지 얹는다.
“…………”
“…………”
그날은 햇빛이 너무 밝았고, 더웠다. 여자는 세련되었고…, 하지만 여자는 별 수 없이 그까짓 사진 때문에 안 했던 화장을 하고 있다. ‘해처럼 살자’면서 몇 번씩 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고 한다. ‘호텔 캘리포니아’를 듣다가 현기증을 앓는 사람은 사막을 건너 벌써 돌아왔는데, 노래방 마이크까지 잡고 있다.
그렇다면, 백하은 씨, 호텔 카리스의 여사장에게는 이런 시를 보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뜯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이 되는고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고나.
그립은 사람아.
(이한직, ‘풍장’ 전문)
글 _ 김윤(시인·eoeul@hanmail.net / 본명 김윤식) / 사진 _ 김보섭 (자유사진가·ericah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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