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삶의 혜안慧眼 보이는 ‘아름다운 100세’
삶의 혜안慧眼 보이는
‘아름다운 100세’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
어르신들은 ‘도서관’에 비유된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세상의 산지식을 두루두루 꿰뚫고 있다는 의미다.
100세. 예전엔 사람의 수명 중 최상의 수명이란 뜻의 상수(上壽)라 불리는 이상적인, 꿈의 나이였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라는 말로 인생의 허망함과 짧음을 비유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과학과 의료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나면서
100세 시대는 현실이 돼가고 있다.
인천도 장수도시에 해당된다. 2014년 3월 기준으로 인천에 거주하는 100세 이상의 노인은 593명이다.
2009년 112명에서 2010년 416명으로 급증했고, 2011년 459명, 2012년 512명, 2013년 575명이었다.
그렇다면 인천에서 100세 이상 고령자가 가장 많이 사는 장수동네는 어디일까.
100세가 넘는 노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남구와 부평구였다.
인천에 사는 100세 이상 노인들의 삶의 통해 장수 노인들이 걸어온 길을 들여다 보자.
100세때 생긴 직장암도 이겨
정군수 할머니(103세)
103세의 정군수 할머니를 만나러 검암으로 가는 길가에는 봄의 화신인 벚꽃이 그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꽃이나 인생이나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다.
정군수 할머니는 약간 허리가 굽고,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말고는 말솜씨 또박또박하고, 맑은 눈, 고운 피부를 가져 103세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꽃분홍색의 잠바를 입고 있었고, 여전히 고왔다. 그는 103년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객들에게 낭낭한 하이톤의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인생이 일장춘몽 같아요. 어차피 다 없어질 텐데 움켜 줘봐야 소용없어요. 나누면서 살아야 복 받아요.“
1912년생인 할머니는 20세에 결혼해 6남매를 낳았다. 시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판사를 지냈고, 남편은 사법서사로 활동한 가풍있는 집안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집안은 기울고 어려워졌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생계에 뛰어들었다. 황해도에서 피난온 뒤 아이들과 생계를 위해 집에서 한복을 만들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고 정성스레 만들기에 주문이 밀려들었다. 삶은 고생스러웠지만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던 시절이다.
정 할머니는 막내 아들 이완기(59, 사진)씨 부부와 산다. 아들, 며느리가 직장에 가고 나면 방 청소, 식사하고 난 후 설거지는 할머니가 깔끔하게 처리한다. 아직도 손놀림이 젊은이 못지않게 빨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할머니는 103세의 나이에도 쉬는 법이 없다. 계속 몸을 움직인다. 동네에 놀고 있는 땅을 텃밭으로 개간해 농작물을 심었다. 땅주인으로부터 농사를 짓지 말라는 항의도 받았지만 땅주인을 설득해 농사를 지었다. 혼자서 돌을 골라내고 땅을 고르며 씨앗을 뿌렸다. 텃밭 일을 하면 등이 땀으로 젖어도 보람과 기쁨은 크다. 올해는 쥐눈이콩, 팥, 강낭콩을 심었다. 여기서 수확한 농산물도 동네교회, 노인대학, 이웃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할머니는 수의 나눔도 실천하고 있다. 아들과 직접 시장에 가서 삼베를 떼어다 수의를 만든다. 할머니는 고생해서 만든 것을 나누는 것이 진짜 보람이라는 생각에 삼베를 빨아서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꼼꼼히 하는 수고를 거친다. 수의는 형편이 어려워 수의 마련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제까지 20여 벌의 수의를 전달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건강을 자신한다. 지병이 없고, 정신이 맑다.
100세를 넘긴 할머니의 밥상은 소박하다. 잡곡밥에 찌개. 김치, 한두 가지 야채 밑반찬이 전부다. 육식을 즐기진 않는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는다.
할머니에게도 건강의 위기가 있었다. 3년 전 100세때 직장암이 발견됐기 때문. 할머니의 나이를 알고 의사는 수술을 꺼렸지만 나이에 비해 강건한 것을 알고 수술을 집도했고, 다행히도 건강을 다시 회복했다. 할머니는 지금 암이 깨끗이 치료된 상태다. 할머니의 친정어머니도 100세에 돌아가셨다.
100년을 넘게 살면서 할머니는 울고싶고 힘들었던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가장 좋았던 시절은 잘사는 집에 시집 와서 5년간 남편과 행복한 신혼시절을 보냈던 때와 아들들 잘 키워 훌륭한 어머니로 칭찬받았을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정 할머니는 남은 여생을 더 많은 기부에 힘쓰고 싶은 소망이다. 100년을 살았어도 인생이 잠깐인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일만 해도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오늘도 텃밭을 개간하며 돌을 고른다.
스트레스 줄이며 건강한 노년활동
노덕종 할아버지(101세)
1914년생인 노덕종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송화군 상리면이다. 할아버지는 젊은날 고향을 떠났다. 북쪽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고, 이것이 발각되면서 고향을 등졌다. 그에게는 고향에 부인과 두 자녀가 있다.
남한으로 내려온 할아버지는 공사장의 일꾼으로, 시골의 농사꾼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대한민국에 와서도 여전히 ‘반공투사’로 활동했고, 이로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지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족은 아들이 아닌 조카 내외다. 조카 노문호(78) 어르신도 6·25 전쟁이 나자 인천으로 피난을 나왔고, 65년도에 삼촌을 만난 뒤 50여 년을 같이 살고 있다. 조카와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혈육을 만난 기쁨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주일을 울었다.
노 할아버지는 100세를 넘게 장수하고 있지만 밥상은 특별하지 않다. 식사는 가리는 것 없이 국, 밥, 반찬을 골고루 먹고 고기류도 좋아한다. 술도 즐긴다. 젊었을 적엔 운동도 많이 했다.
할아버지는 노인대학 가는게 노년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곳에서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 행복하다. 노인대학에서도 할아버지는 최고령이다. 얼마 전에는 노인대학에서 할아버지의 건강과 장수를 기념하는 ‘강건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00년의 세월을 굽이굽이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인생에서 제일 기뻤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처음 색시하고 연애하고 결혼할 때 제일 좋았고, 아들이 태어나 아버지가 됐을 때 가장 기뻤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부평구 청천동에서 70여 년 가까이 살았다. 인천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그래도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져만 간다. 입버릇처럼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되뇐다. 조카가 “고향에 가서 뭐하실래요.”하고 물으면 “농사지으며 살지”하면서 무덤덤한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꽃 피운다. 고향은 100세가 넘은 할아버지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숨결같다.
할아버지는 황해도에 남기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적십자사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여러 번 한 바 있다. 들려온 답은 가족들이 행방불명되어 찾을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노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통일이다. 통일이 돼야 만백성이 편안해진다는 생각이다. 눈에 선하고 애틋한 고향땅을 그가 살아서 밟아 보기를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 할아버지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다.
- 첨부파일
-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