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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5대 왕 철종이 된 '강화도령'
아이들의 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눈에서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안혜연(만월초 6), 혜경(같은 학교 3)이는 탐방 전날 용흥궁과 철종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으로 공부하고 질문지를 나름대로 준비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엄마 문미경(36)씨는 “방학이라 구들장을 지는 아이들에게 좋은 글감 찾기를 해주려고요”라며 운을 떼었다. 세 모녀는 반복되는 일상의 진공포장을 벗겼다.
임금님 살던 집 둘러보자
강화읍에서 고려궁지로 조금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용흥궁’이라 쓰여진 작은 표식을 발견할 수 있다. 좁은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한옥이 보인다. 여느 가정집과 다름없는 대문 앞에서 긴가 민가 살피는데 ‘컹컹-’. 앞집 개 짖는 소리, 역사를 베어 문 듯 아프게도 짖어댔다.
일행은 주택가 골목에서 마주친 이남숙(38. 문화유산해설사)씨를 동네 아주머니인 줄 알고 한동안 아는 채 않고 서 있었다. 이곳에선 진짜가 다 가짜 같아 보였다. 해설사는 신분증을 보이며 다가와 친절한 웃음을 건네 초면의 서먹함을 없애주었다. “지금 이곳은 작년 7월부터 문화재 보수공사기간인데 동절기라 3월까지 중단상태에요. 벽체는 다 헐어지고 앙상한 기둥들이 지붕을 받쳐 든 채 을씨년스럽기도 하죠. 아쉽지만 오늘은 눈보다도 귀를 크게 열어두시면 좋을 듯싶네요.”
이곳 저곳 공사중인 용흥궁을 둘러보았다. 용흥궁은 조선 25대 철종(1849∼1863)이 왕으로 등극하기 전 약 5년간 살던 곳으로 원래 3칸짜리 초가의 볼품없던 집이었다. 임금이 된지 4년 되던 해(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기와집으로 확대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의 살림집 유형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긴 하지만 잠저라기에는 초라한 양반네 집 정도 크기 밖에는 안 되어 보인다. 몇 차례에 걸쳐 규모를 확장했다고 하나 웅장함이나 화려함은 찾을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과 오른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강화도령 원범(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철종잠저구기비’가 들어있는 비각 1동 등이 있다. 11시 양지바른 때, 비각 아래로 일행의 그림자가 엎드렸다. 용흥궁을 둘러보노라면 권세의 위용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했던 왕으로의 등극. 세도정치의 큰 세력 앞에 배운 것 없던 강화도령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언니 혜연이는 “만약 철종이 왕에 등극하지 않고 일반 백성으로 강화도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가난했지만 농사짓고 나무하고 맘은 편했을 거예요. 부모형제와 자식, 사랑하는 사람을 다 잃으면서까지 왕이 되어야 한다면 전 왕의 자리를 버릴래요.”
“안타까워서 하는 소린 줄은 알지만 왕이 되고 안 되고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했어.” 엄마는 어린시절의 원범에게 모성이 쏠렸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권력의 회오리에 휘둘린 불운한 왕의 삶에 동정이 갔다.
“여담이지만 원범에게는 양순이라는 정인이 있었다면서요?” 팽개쳐 둘 뻔 했던 여인의 이름이다. 원범의 사랑! “임금이 되고나서도 강화를 못 잊고 술을 드실 때면 더욱 강화가 그립다고 하셨대요. 양순이 역시 강화도령을 못 잊고 함께 거닐던 길을 헤매고 다녔다는데, 이런 일이 철종임금의 귀에 들어 갈까봐 일가에서 사졸들을 보내 양순을 없앴다는 얘기 전해지더군요.”
구중궁궐에 머문들 마음이 지옥이라면 강화의 무지렁이로 사는 편이 더 행복했을 것을… 마음이 내남없이 숙연해진다. 일행은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철종의 외가로 발길을 돌렸다.
임금님 외가댁에 놀러가자
길 입구에서부터 약간 질퍽이는 황토흙을 밟으며 철종의 외가로 들어섰다. 비좁은 골목길 원범의 집과는 달리 확 트인 농지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대문을 밀치니 ‘꽤에엑’하고 오래된 쇳소리가 울었다. 걱정했던 대로 이곳 역시 보수공사 중. 정원 옆으로 자재들이 파란 천막을 덮고 봄을 기다린다. 마당에 융처럼 깔린 이끼를 문지르다가 해설사는 역사속으로 미끄러졌다. “1853년(철종4) 강화유수 정기세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인데 그 후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이 살았지요.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 목조건물로 45칸이었다고 전할 뿐.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 모양의 몸체만 남아 있답니다.”
막돌로 쌓은 화장담이 간단하고 소박하게 둘러져 있다. 당시 일반 사대부의 웅장한 집 규모와는 달리 기교 없고 서툴러 보이기도 하지만, 그 예스러움과 고아한 멋은 충분히 살아있다.
“화장담!” 이름이 예쁘다며 엄마는 “돌담에도 이름이 있다니 집에 가서 사전 좀 찾아 봐야겠어요.” 한다.
댓돌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모녀들은 마루에 올라섰다. 수분을 다 뺐긴 관절같은 널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려 체중을 부둥켜안고 살금살금 앉아야 했다. “외투 벗고 몸무게를 줄일 걸” 이들은 주인 없는 집에 올라선 것을 미안해 한다. 그래도 엄마는 원두막처럼 바람 잘 통하는 누마루에서 사랑방 손님과 책을 읽거나 시를 읊으며 낮잠을 즐기고 싶어 하는데. 체감온도 영하 9도, 겨울바람은 상념을 오래 노출시키길 꺼려했다.
글 _ 조은숙 (부평사람들 기자·eyagi9090@yahoo.co.kr) /
사진 _ 김성환 (자유사진가·koin1@incheon.go.kr)
※이 코너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은 둘러보고 싶은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정해서 전화(440-2072) 또는 이메일(happyjka@incheon.go.kr)로 신청하세요. 참가하는 분께는 문화상품권(1만원권) 2매를 드립니다.
비운의 왕, 철종
‘강화도령’ 철종은 서울에서 태어나 당파싸움에 쫓겨 아버지와 함께 강화로 유배되었고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아버지 전계군과 어머니를 천주교 탄압으로 잃은 후 나무꾼으로 홀로 19세까지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는데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전계군의 막내아들 원범을 왕으로 정한 것이다.
150여 년 전 철종이 왕으로 지목되어 영의정 정원용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이 그를 모시러 왔을 때, 강화도에는 상서로운 두루미 떼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원범은 그들이 오자 잡으러 온 줄 알고 산 속으로 달아나 3일간을 숨었다. 붙들려 내려 왔을 때 살려 달라고 애걸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14년간 재위하는 동안 8명의 비빈에게서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하나같이 단명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혜옹주도 출가한 지 3개월 만에 죽는 등 불행이 끊이질 않았다. 서민으로 지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힘을 썼지만, 당시 주위의 간신들의 방해와 자신의 병으로 인해 정치를 다하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철종의 대를 이를 후사가 없어 다시 고종이 등극하게 된다.
강화역사관 전시실에는 철종 임금을 모시러 가는 ‘강화행렬도’가 있다. 2000년부터 강화군 지역 축제 행사의 하나로 철종의 등극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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