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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와 맞선 격동의 군영

2005-03-01 2005년 3월호

아침에 오렌지 한 개를 삼키고 온 사람처럼 윤정자(47) 문화유산 해설사는 노란 에너지에 꽉 차 있었다. 폐활량도 커서 확성기를 달았나 싶게 목소리는 쩌렁쩌렁, 단체가 아닌 너 댓 사람 앞에서도 습성처럼 볼륨이 높다. “좋아서 그래요. 우리고장 문화재를 알리는 게 신이나요.”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채 조용하게 있던 엄마 곽화자(41)씨가 입을 열었다. “집에서 공부하라고 닦달만 하기 미안하잖아요. 역사 속으로 소풍가자! 하고 데리고 나왔죠.” 딸 김지희(부곡초2)와 같은 학교 4학년 안유빈양은 사촌지간. 실로폰으로 높은 도를 칠 때의 그 경쾌한 재잘거림이 그치질 않자 엄마는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세웠다. “쉿! 조상님 겨울잠 깨실라 조용히 해.”

‘화도진’이란 뜻이 뭐예요?
봄이면 화도진 공원(동구 화수동 138)이 굉장히 예쁘다. 입구부터 2만여 그루의 철쭉이 축포를 터뜨리듯 일제히 피어나면 축제를 방불케 할 정도. 매년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날에는 이를 기념해 상춘객들과 함께 화도진 축제를 갖는다. 구한말 고종이 어영대장을 인천에 내려 보낸 행차 장면을 재현하며 전통무예 공연, 조선병기 전시회 등을 연다. 조선시대 감옥 및 형틀 체험행사와 주먹밥 무료시식회도 열린다. 공원의 동헌마당을 전통혼례식장으로 개방하고 전통혼례에 필요한 비품도 빌려주고 있다.
방문객 중에는 우연히 동네 공원인 줄만 알고 왔다가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덤으로 횡재하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음, 꽃이 많아서 화도진이구나.” 유빈이는 꽃 ‘花’자를 연상했나 보다.
“아니요. 이곳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쳐진 육지를 뜻하는 ‘곶’의 모양이어서 ‘곶섬’으로 불리다 된발음 때문에 ‘꽃섬’이 됐어요. 옛날에 군사기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이를 한자로 ‘화도진(花島鎭)’이라고 표기한 것이지요.”

“서울로 가는 모든 배는 멈추시오”
고종 16년(1879년) 인천 앞바다에 일본 군함을 비롯해 외국 선박이 자주 출몰하자 외세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화도진을 설치했다. 연희 포대·괭이부리 포대·북성 포대·논현 포대를 관장하며, 영종도에 설치된 수군기지와 더불어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 수로를 지키던 진지였다.
상업을 억제하고 무역을 금하는 등 철저한 대외 봉쇄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시대에 인천은 문물 교역을 위한 항구가 아니라 한양 수비를 위한 지방 군사기지로 강화도 조약 이후 무리하게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 이 일대가 다 바다였다는 말인데 상상이 안가요.” 지희 엄마는 화도진 가까이 갯고랑 바닷물이 들고나고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지형을 보면 너무 많이 바뀌었지요. 바다가 매립돼서 땅이 엄청나게 늘어난 상태인데, 그리 높지는 않지만 바다에서 섬을 보면 해발 80m가 됐다고 하네요. 원래 터가 이곳보다 좀 아래쪽에 있었다는데 15년간 있었던 화도진이 개항으로 인해 기능조차 무의미한 곳으로 변했어요.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혁되면서 모든 군대가 군부에 소속돼 철폐되었고, 1890년대 완전 폐쇄되면서 판자촌이 들어서고 자취가 없어졌지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불과 16년 전이다.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1982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복원계획을 세우고 1988년 올림픽이 있던 해 9월, 검여 유희강의 화도진 복원도(그림지도)를 토대로 동헌과 포대를 갖춘 건물로 복원해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동헌 앞마당 휘장치고 한미 수호통상조약
이곳에서 고종 19년(1882) 5월 22일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에 이어 6월에는 영국, 독일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잇달아 맺어 우리나라 근대화와 문호개방의 역사적인 현장이 되었다.
인천항을 열지 않기 위해서 외세를 감시하던 곳 화도진. 3년 만에 그 본 뜻과는 다르게 서양 각국과의 조약 체결을 그 자리에서 맺게 된다. 조선정부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인 인천의 개항을 꺼려 부산항, 원산항이 개항되고서도 2년이 지나서야 문을 열었고 이는 1883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세가 급변해 개방을 안 할 수 없게 된 약소국은 울며 겨자를 먹지 않았을까? 흑백의 양면 색종이를 ‘훽’ 뒤집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동헌은 관아의 본 건물로, 방 한 켠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모습이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이들은 진짜 사람 같아 신기해하면서도 흠칫 두려워한다. 왼편 내사는 안주인의 거처로 방마다 반닫이, 반짇고리, 보료, 패물함, 버선장 등이 놓여있고 대청마루에는 찬장과 쌀뒤주 등 당시 생활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내사에서 옛 물건들을 보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TV 이순신드라마에서 쇠단추가 박힌 저런 갑옷 봤어요. 우리도 책가방 메고 다니면 무거운데 장군님도 어깨 아팠을 거예요. 그리고 큰 자루처럼 생겨서 별로 안 예뻐요.” 유빈이는 갑옷은 관두고 조선시대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하던 장대만한 쌍나팔을 탐냈다. 유물전시관으로 꾸며진 행랑채는 화도진 그림지도와 100분의 1로 축소된 화도진 복원 모형 그리고 당시에 사용됐던 불랑기 4, 5호 등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군사제도라든가 기록들을 보면 70~80명 정도의 군인이 주둔하면서 방어했다고 짐작돼요. 좁은 방 6칸에서 그 많은 군인들이 어떻게 잠을 잤을까 궁금하죠? 포대로 파견을 나가고 해서 인원은 들쑥날쑥 했다고 하네요.”
해설사는 동헌 옆 복원된 우물가로 안내했다. 당시 병영과 군사들이 사용하던 우물은 햇빛에 눈부시다. 일행은 은화 100원씩을 물속에 빠뜨리면서 소원을 말갛게 담갔다. “저는 짝꿍 잘 만나게 해 달라고 했어요.”, “저는 모두 오래 살고 전쟁 안 나게 해 달라고요.”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다. 너무 깊이 소원을 빠뜨렸나보다.
지희와 유빈이는 그동안 창작동화, 과학동화를 많이 읽었는데 앞으론 역사책을 관심 있게 읽을 거라고 한다.
인천역사 공부시간에 선생님이 “화도진에 대해서 말 해 볼 사람?” 하면 번쩍 손을 들고 발표할 거라고. 엄마와 아이들은 이번 탐방이 계기가 되어 인천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기로 맘먹었다.

 

찾아가는 길 _ 대중교통 이용시 동인천역에서 하차 2번, 10번 시내버스(5분거리)를 탄다. 화도진공원까지 걷기는 15분 정도, 택시를 탈 경우 기본요금이 나온다.

 

글 _ 조은숙 (부평사람들 기자·eyagi9090@yahoo.co.kr) / 사진 _ 김성환 (자유사진가·koin1@incheon.go.kr)

 

※이 코너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은 둘러보고 싶은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정해서 전화(440-2072) 또는 이메일(happyjka@incheon.go.kr)로 신청하세요. 참가하는 분께는 문화상품권(1만원권) 2매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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