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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치의 유혹’에 맞서는 작은 종달새와…,
2005-03-01 2005년 3월호
2월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스하다. 이렇게 그만 겨울이 가려나? 그러나 초순이니 아직 봄은 아니다. 설령 봄 날씨라고 해도 이러다가 어느 날 꽃샘추위가 다시 올 것이고 또 느닷없이 눈발이 날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종달새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개나리도 피었을까. 느낌만이지만 지난겨울, 춥고 음산했던 회색의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 즐겁다.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기쁘다.
“한번 가 봐요. 정말 봄 종달새가 있어요. 그런데 그냥은 절대 못 나와요.”
몇 주 전, 다녀온 적이 있는 Y는 이렇게 봄을 말한다. 종달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구보건소 2층 계단을 올라선다. 아하! 묻지 않아도 금세 알아본다. 흰 가운도 그렇고, 밝게 생글거리는 눈빛도 그렇고, 조붓한 입술과 갸름한 얼굴이 하나같이 귀엽고 앳되다. Y의 말이 맞았다. 종다리. 봄보다 우리가 먼저, 예쁜 종다리 김수경(金洙京) 씨를 만난 것이다.
종달새는 종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 봄이 왔다고 하루 종일 종달종달 고운 소리로 노래해서 종다리. 그래서 또 고천자(告天子). 웃으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겁(?)을 주고, 웃음으로 달래기도 하고, 그러면서 용기를 북돋기도 하는 김수경 씨. 그녀는 동구보건소 ‘금연클리닉’ 금연상담사이다. 딱 어울리는 종다리 역할이다. 2층으로 올라서자마자 복도 한가운데, 누구나 들어오기 쉽게, 누구나 얼른 이 종다리 금연상담사와 눈이 마주치게 얕은 간이 칸막이로 된 내부가 금연클리닉이다.
“왜 끊으려고 결심하셨는지 세 가지만 이야기해 보세요.”
“음, 음,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고, 음, 몸도 찌뿌드드하고, 그리고 중요한 건, 음, 요 며칠 전 아내가 첫 아기를 낳았거든요.”
삼십 초반인가. 남자 하나가 무슨 잘못이나 한 사람처럼 몹시 죄스러워하며, 또 수줍어하며 떠듬거린다. 옆에서 들어 보니 아주 힘들여 결심을 한 것 같다. 그걸 종다리 수경 씨가 빙그레 미소를 띠며 알아챈다. 그렇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흔들리기가 쉽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는 여기에 오지 못한다. 제 발로 와서 걸려든 포로는 어떻게 하든지 낚아채서 단번에 완벽히 제압해야 하는 것이 수경 씨의 전술이고 목표. Y가 그냥은 못 나온다고 한 말은 이런 뜻이다.
드디어 수경 씨가 종다리 탈을 벗고 남자에게 사람 가슴 모형을 내놓는다. ‘3.3인치의 유혹’을 막기 위해 검은 타르가 허파꽈리 속속들이 침착(沈着)한 징그러운 그 모형 허파를 열고, 손으로 가리키며 일산화탄소 중독 운운, 겁을 준다. 3.3인치는 담배를 뜻하는 말로 ‘3.3인치의 유혹’이라는 코너 굿맨의 담배에 관한 책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그런 다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폐암으로 돌아간 모 코미디언의 생전 투병 모습 사진을 꺼낸다. 음. 남자가 입맛을 다신다. 생글생글 웃으며 내민 수경 씨 손 위에 남자가 꼼짝 못하고 주머니에서 3천 원짜리 담배 한 갑을 꺼내 올려놓는다. 수경 씨가 짓궂게 열어 본다.
“어머나, 두 개비밖에 안 피웠네요.”
“네.”
“아쉽죠?”
장난꾼처럼 수경 씨가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이를테면 수경 씨 나름대로 아주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다. 담배 갑에 날짜와 이름 같은 걸 적고 테이프를 붙인 뒤, 개인 카드를 작성하고는 체중, 신장, 혈압을 재고 중독 테스트를 한다. 다행히 남자는 중독 정도가 중간급이다. 가급적이면 술을 마시지 마라, 흡연자와 동석하지 마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라, 하는 따위의 몇 가지 주의 사항과 함께 남자에게 몸에 붙이는 금연 패치를 한 갑 내 준다. 무료라고 한다.
“흡연 중독을 일으키는 것은 니코틴이거든요. 이걸 붙이면 흡연 욕구가 사라지죠. 물론 금단 증상도 없구요.”
일주일 후에 다시 와서 체크를 할 것을 약속하고, 남자는 들어올 때보다는 훨씬 편안해진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부터 6개월간 이 남자는 종다리 간호사의 행복한 포로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담배를 졸업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종다리 상담사를 이길 수 있을까? 작년 11월 1일에 처음 문을 열고 어제까지 근 200명 정도가 다녀갔다고 한다. 그리고 좀 성급할지 모르지만, 그 중 70%가 넘는 사람들이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대략 150명쯤이다. 이화용(李和容) 동구청장이 시범으로 금연 클리닉에 참가, 성공한 케이스 1호. 한 여류 소설가도 참가한 지 한 달 이상 지났는데, 거의 완벽하게 성공 조짐이 보인다고 자랑이다.
그런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요즘은 매일 20∼30명씩 찾는다고 한다.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상담을 하는 것이 그렇게 신이 나는 모양이다. 타르와 싸우고, 니코틴과 싸우고, 일산화탄소와 싸우는 것이 보람이란다. 병원 간호사 시절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 입소문이 났는데 소문 중에는 김수경 씨가 아주 친절하고 명랑한 데다가, 중요한 한 가지, 용모가 예쁘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앞의 두 가지는 틀림없이 맞다. 그렇다고 마지막 한 가지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꼭 그 때문에 금연클리닉이 성시를 이루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종다리의 날개가 착한 천사의 것이고 그 음성이 봄 시냇물을 닮았기 때문에 담배 끊고 싶은 사람들이 저절로 오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봄을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담배는 안 하신다고 하셨죠?”
그나마 자기 직무에 관한 것이지만 도무지 마주앉아 이야기할 틈이 없다. 다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지망생 한 명이 또 들어온다. 다소 굳은 듯하던 종달새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아, 아저씨! 남자는 클리닉에 등록한 지 여러 주일째인 듯하다. 삼십 몇 년 흡연 경력을 이제 말끔히 지워 나가고 있는 중이다. 몇 마디 주고받고는 다시 약을 건넨다.
이 이저씨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은 게 더 대견한 듯해 보인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기분 좋은, 흔한 세상 아저씨 얼굴로 초콜릿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감사의 선물! 수경 씨가 얼굴이 발개서 고개를 흔든다. 그 모습이 우습고 정겹고 귀엽다. 뭐, 별거도 아닌데. 담배 값으로 치면 벌써 돈 십만 원은 후딱 달아났을 걸. 이 호남(好男) 아저씨는 오늘 종다리가 못내 고맙고, 또 한편 자기 앞에 펼쳐진 인생이 더없이 행복한 것이다. 오후 네 시가 넘도록, 그러고도 연달아 5명의 금연 지망자가 차례로 들어온다. 하는 수 없다. 나눈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일어설 수밖에 없다.
종다리 수경 씨에게는 도무지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없다. 한 점의 그늘도 한 줄의 구김살도 없다. 시를 별로 읽지 않아서 조금은 ‘비기 싫지만’ 그러나 차라리, 가려진 듯하고 음울하게 느껴지는 실루엣이나 환상보다는 천진한 아름다움, 정직하고 건강한 현실의 아름다움이 훨씬 더 예쁘고 친근하다.
삼십 초반인데 수경 씨는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처럼, 아직은 자신이 더 날고 싶은지 옛날 ‘펄 씨스터즈’ 스타일 청바지를 입었다. 가운 밑에 드러난 바지가랑이가 나팔. X형 끈으로 묶은 젊은 나팔바지다. 마신다면 소주 한 병. 주말에는 가끔 영화 구경도 가고, 추리 소설도 읽고, 또 주일학교 교리 교사 노릇도 하고, 성당에서 만나 친구였다가 남편이 된 한 남자의 아내도 되고, 함께 모시고 있는 그 남자 부모의 며느리도 되고…. 힘이 벅찬 날도 있고, 가뿐한 날도 있고…. 그러나 현실의 종달새 수경 씨는 이런 모든 것이 더없이 행복하고 소중할 뿐이다. 아, 종다리!
우연일까. 오늘 이 종다리 수경씨를 만나게 되려고 문득 어제는 천수만 새들을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乙자로 눈 내린 논바닥에 내려앉은 가창오리, 기러기, 그리고 아직은 입을 다물고 겨울을 지내고 있는 종다리들. 겨울새들이 거기 있어야 하듯, 우리 종다리 수경 씨는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그런 아름다움, 예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꼭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글 _ 김윤식(시인·eoeul@hanmail.net) / 사진 _ 김보섭 (자유사진가·ericah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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