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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마다 울려퍼진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2005-03-01 2005년 3월호

계양구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오롯이 서 있다. 황어장터란 예로부터 이 지역에 잉어가 많이 잡힌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해 8월 준공된 가로 13.2m, 세로 4.5m, 높이 13.1m의 이 기념탑은 황어장터의 역사성과 3·1만세운동의 기상을 도도히 전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계양주민들은 3월 24일 심혁성 지사의 주도로 600여명이 일제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를 불렀다.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했고,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2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심혁성 탈환운동을 전개했다. 강서지방에서 최초이자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황어장터 만세운동으로 이은선 지사가 순국했고 40여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당했으며, 중심인물로 지목된 인사들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탑의 뒤편에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은 4면으로 구성돼 있는데 입구 오른편부터 차례로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1면에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아래편 전시대에 놓인 기미독립 선언서와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관련 판결문이 당시의 사실을 증명해 준다. 왼편으로 두 걸음만 옮기면 제2면이다. 황어장터와 3·1만세운동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설명했다. 여기에는 3·1만세 운동 당시의 계양지역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흑백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어 눈길을 붙잡는다. 아래쪽 전시대에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이 보도된 1919년 3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가 증거 자료로 전시돼 있고 심혁성 지사의 수형자카드, 예심종결문 등도 눈에 띈다.
이와 함께 3면에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의 전개’, 4면에는 ‘일제의 탄압과 수난’ 등 황어장터의 만세운동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기록물들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한편 중앙전시대에는 심혁성 지사의 초상화와 판결문 등이 전시돼 있어 어린 학생이라도 치열했던 인천에서의 만세운동을 상상해 보고 공부하는데 충분하다.
전시실 이용시간 _ 평일 09:00~18:00 토요일 09:00~13:00 / 2·4주 토요일과 매주 일요일은 휴관
문의 _ 계양구 문화공보실 (450-5871~6)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
인천 3·1운동의 불씨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서 지펴졌다. 당시 인천의 유일한 공립보통학교였던 4년제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3·4학년들이 3월 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합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인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가 창영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졌다. 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당시의 고증 자료를 수집하고 재판 기록문을 입수해 1995년 모교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에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옥고, 징역, 부역을 당한 동문의 명단과 현황이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라는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명진의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을 발췌해 새겨 넣었다.

용유동 삼일독립만세 기념비
기미년 삼월일일의 만세운동은 비단 내륙지방에서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의 용유도에서는 3월 23일 조명원, 조정서 등 열 한명이 혈성단이라는 비밀 항일 투쟁단체를 결성하고 만세 격문을 배포한데 이어 28일에는 관청리 광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무참히 짓밟혀 옥고를 면치 못하고 독립을 찾지는 못했지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는 바다와 육지에 한결같이 일렁였다.
공항고속도로 신불IC를 거쳐 공항남측도로를 달리다 용유도 방면으로 접어들면 덕교삼거리를 지나 용유중학교 옆에 용유쉼터가 조성돼 있다. 쉼터에는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인 삼일독립만세 기념비가 서 있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게 한다. 기념비에는 ‘애국애족’‘지성보국’이라 적힌 두 기둥위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세운동의 현황과 추도시, 용유8경 등이 새겨져 있다.

 


글 _ 정경애 (happyjka@incheon.go.kr) / 김성환 (자유사진가·koin1@incheon.go.kr)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운동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에 돌입, 만세운동 참여
3월 8일 인천시내 독립선언서 다수 배포
3월 9일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만세운동 전개. 경인가도 50여명이 만세를 부르다 주동자 1명 체포됨
3월 13일 소래면 주민들이 소래산에서 만세운동 전개
3월 24일 부평 황어장터에서 600여명이 만세운동 전개
3월 27일 문학동 만세운동
3월 28일 용유면 만세운동
3월 30일 인천 내리 상가철시 운동
4월 1일 월미도 만세운동
4월 23일 인천 만국공원 13도 국민대표자회의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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