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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떠나는 의사 선생님, 인천시 공의 김명수 씨

2005-04-01 2005년 4월호
우리 시청에 이런 의사 선생님이 근무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시청이라 하면 시민들이 민원 서류를 제출해서 무슨, 무슨 허가를 받고, 또는 이의 신청을 하고, 또는 세금이나 사용료, 수수료를 내고 이런 저런 수속을 밟고 하는 일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행정 전문 공무원만 근무하는 곳인 줄 알고 있었는데, 김명수(金明洙, 35세) 씨 같은 공의(公醫)도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6대 광역시에 1, 2명씩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사 선생님들은 신분은 물론 공무원이지만 국방부 소속 공무원, 즉 군의관인 셈이다. 그러니까 김명수 씨도 현재 군인, 대위 신분이다. 그러나 그의 직책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천광역시 보건정책과 역학조사관.
“군인이었으니까 이제 제대하는 겁니다. 다시 학교로 갑니다. 학교에 가면 연구 강사가 됩니다.”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어투의 단정함. 진한 눈썹과 자주 미소를 머금는 두툼한 입술. 휘청거릴 만큼 크지 않은 키. 좀 기름하다 싶은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선하면서 지성을 갖춘 신사의 느낌이다. 옛날로 치면 마을의 초시 어른쯤 되어 보이는 그런 인상이지 싶다. 물론 초시 어른에서 ‘늘 가래를 돋우는 헛기침과 범접 못할 지나친 위엄’은 제하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의사 선생님이 3년간 군 생활, 즉 인천광역시 공의 생활을 마치고 이제 전역하는 것이다. 2002년 4월에 부임했는데 어느새 3년이 지나 복무 기한이 차 버린 것.
남들은 다 군 부대에서 생활하는데 어째서 김명수 씨는 인천시청에 와서 근무하게 된 것일까. 김명수 씨가 군대에 입대하던 2002년은 군의관 모집 정원이 다른 해보다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의관 대신에 대부분이 공중보건의(公衆保健醫)가 되어 낙도 지역에 배치되게 되었는데, 내과 중에서도 감염내과(感染內科)를 전공했기 때문에 역학조사원(疫學調査員)이라는 특수 근무 형태로 인천시청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근무지 배치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그것을 옆에 앉아 있는, 동종 업자(?)여서 유달리 정이 들 수밖에 없는 시 보건정책과 간호주사 김정윤(金貞倫) 씨가 안경 너머로 넌지시 귀띔해 준다.
“조금 섭섭하네요. 하지만 김명수 씨는 틀림없이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될 거예요. 이를테면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 인간미 넘치는 진실한 의사 말이지요.”
나이로야 까마득한 후배, 차라리 조카뻘 같은, 그러나 착하고 의젓한 김 선생을 보내는 것이 고참 간호주사 김 씨도 못내 서운한 모양이다. 그래도 봄에 떠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다. 늦가을쯤, 이 세상 모든 것이 모조리 조락해 버리는 그 눈물겨운 가을, 늦은 날에 떠나고 떠나보내는 것은 인간사에 가장 못할 일이다. 매화, 추우면서도 다정한 그 꽃잎이 있어서 봄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잘못되었다. 김명수 씨가 제대하는 것은 이런 이별이 아닌데 엉뚱하게 감정이 비약했다. 그는 이제 모교 병원 세브란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연구를 하고 더 의술을 연마해서 허준(許浚)이나, 이제마(李濟馬) 버금가는 명의가 될 것이다.
김명수 씨는 아쉽게도 가수 이미자의 ‘총각 선생님’은 아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던 해에 결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 캐나다에 가서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하고 있다. 겸해서 우리 유학생들에 관한 코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방학이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일이 반복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며 참으로 선하고 무던한 웃음을 웃는다. 그럼 아기는 또 언제 가질 것인가.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사람이니 퇴근 후면 그냥 집으로 돌아와 텅 빈 방에서 컴퓨터를 만지거나 책장이나 넘기겠지.
이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의 사고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신세대의 열린 사고 방식이라고는 해도 아내가 없는 것이 금세 들통 난다.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그가 입은 옷의 색깔이 영 맞지를 않는다. 의사 선생님의 누른색 카디건 속에는 흰색 가는 줄이 쳐진 분홍색 와이셔츠, 어두운 고동색 계통의 넥타이, 아무리 보아도 색깔이 제각각이다. 이쁜 아내가 곁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코디가 되었을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해 드릴까요? 제 이름이 원래는 ‘영신’이었대요.”
지청구를 할 듯하니까 눈치를 챘는지 얼른 엉뚱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런데 들어 보니 이야기 속에 소설가 김홍신 씨가 등장한다. 김명수 씨의 부친은 원래 하사관으로 직업 군인이었다고 한다. 부친이 강원도 철원에 근무할 때 학훈단 출신의 김홍신 소위가 처음 부임해 오면서 소대장과 선임하사로 만났다는 것이다. 그때 김명수 씨가 태어났고, 그래서 소설가 김홍신 소위가 작명을 해 준 것이 영신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훗날 김명수 씨 할아버지께서 집안의 돌림자인 수(洙) 자를 넣어 지은 지금의 이름을 정식으로 호적에 올리는 바람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이야기는 그다지 썩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20년도 더 지난 1980년대 초 인천의 문인 카페 ‘시랑(詩廊)’에서 무슨 문학 행사가 끝나고 김홍신 씨와 함께 했던 저녁이 생각난다. 얼굴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구월동 시청 근처 원룸에서 살았는데 이제 다시 서울 신촌으로 이사 가야 합니다. 저도 조금은 서운합니다. 여기 분들이 워낙들 잘해 주셔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조류 독감이지요. 인천시청에 근무 하는 동안 경험했던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조류 독감이었습니다. 여기서 3년 근무하는 중에 그때처럼 긴장되고 또 바빴던 적도 없었습니다.”
SAS. 조류 독감이라면 김명수 씨가 부임하던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4월까지 중국, 동남아 지역에서 유행하면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사건이 아닌가. 특히 인천공항은 우리 나라 출입구로서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던 사건이다. 그때 김명수 씨가 실력 발휘를 한 것. 그 지역을 여행한 환자로 의심되는 여행객들을 접견하고 검역 결과에 따라 조류 독감 여부를 판별하고 격리를 결정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아무도 모르게 이 젊은 의사 선생님이 해낸 것이다.
그밖에 3년 동안 그는 학교, 대규모 사업체 등 다중을 상대하는 집단 급식소나 큰 식당들에 대한 역학 조사를 벌여 전염병 예방을 통해 인천 시민의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이제 제법 인천을 알고 인천에 정이 들 만하니까 이 선한 얼굴의 의사 선생님은 떠나는 것이다.
“인천 정말 사랑합니다.”
인천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마산 사람 김명수 씨가 그렇게 인천에 와서 3년 동안 인천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게 되었다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전혀 없는 말투로 말한다.
궁금하다. 그는 숭의동 로터리 근처 마산집은 가 보았을까. 거기서 민어회를 먹어 보았을까. 김명수 씨가 술을 못한다 해도 좀 일찍 만났다면 그 집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우리들 건강을 위해 있는 줄도 모르게 조용히 근무하다 떠나가는 젊은 의사 선생님. 가끔 인천에 와서, 그렇게 가끔 만날 수 있다면….
글 _ 김윤(시인·eoeul@hanmail.net / 본명 김윤식)
사진 _ 김보섭 (자유사진가·ericah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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