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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라의 암적색 장미

2005-05-01 2005년 5월호
조금 있으면 이 방의 주인을 위해 태양은 마음껏 붉어 버린 장미의 황혼을 보내 주겠지. 서쪽 시가지가 내다보이는 창문, 그래서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죽음을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장미 가시를 아니 떠올릴 수 없다. 패혈증보다 무서운 암적색이다. 그래서 또 코피가 날지 모른다. 벌이 날아들지도 모른다. 잉잉거리는 머릿속, 비틀거리며, 누군가 꼭, 버림받아 쓸쓸하게 계단을 돌아 내려가야 할 4월. 슬픈 영혼은 독을 마신 듯, 장미차(薔薇茶)의 향기에 눈멀어야 한다.
벽에는 한 다발 꽃 이파리가 말라간다. 거칠게 빗은 머리카락의 물결, 그 굵은 컬, 푸른색 크리스탈 귀고리가 찰랑거리는 여교수를 누구라 이름해야 하나? 아, 이집트! 크눈 신전의 하토르,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신전 원주(圓柱)에 양각된 그 여인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모른다. 작은 종지 잔에서 새콤하게 풍겨 올라오는 냄새는 분명 산딸기 향이건만 목요일 오후는 마른 장미 이파리 때문에 검붉고 어지럽다.
몸살 기운 때문일 것이다. 맞다. 이런 몽롱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놈의 미열 때문이다. 아니, 장미차를 연거푸 넉 잔씩이나 먹여서 그럴 것이다. 아니면 「대낮」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아,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임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강한 향기로 부르는 코피/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서정주, ‘대낮’ 부분)

그래서 이렇게 솨르르 몸에 소름이 돋듯 열이 밀려 오르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잡는 여교수 이윤희(李侖姬) 씨는 이 봄날 하늘색 그대로인데, 따라온 사람들은 이렇게 온통 하늘색인 것도 죄가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햇빛 속에서 보는 이윤희 씨의 모습은 다르다. 이런 패션을 스포티 룩이라고 하는지. 정장은 틀림없이 아닌 데도 그 침착하게 가라앉은 하늘색이 그윽한 멋을 낸다. 속에 받쳐 입는 티셔츠 같은 옷도 자기가 직접 그린 블루 튤립을 프린트한 하늘색 계통이어서 더 그렇다. 이 교수는 물론 암자색이건, 녹색이건, 검정이건 소화해 낼 것이다. 더구나 사십 후반의 티를 드러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 의복을 한껏 소화해서 입는 그런 센스가 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의상 모델 같다. 그 때문에 귀고리가 파랗게 물이 들어 버린 것이고, 또 167센티의 늘씬한 신장(身長) 밑의 구두도 따라서 물빛이 된 것이다.
그러나 눈부신 햇빛 아래서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이 교수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무용과 선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늘씬하고 어여쁜 용모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풍성한 머리 숱, 검고 깊은 눈동자, 햇빛 속에서 선명하고 또렷하게 음영이 지는 콧날, 입술, 길고 가는 손가락, 그리고 단정하면서도 시원한 이마, 맑은 목소리, 거의 흠잡을 곳이 없는 미인이다. 화를 내면 그것도 시만큼 아름다울까. 햇빛이 몹시 눈부시다.
이 미인이 인천 재능대학 아동문학과 교수이고 동화작가이고 아동잡지 『아침햇살』발행인이다. 여러 해 전에 어린이문화대상(문학부문)을 받기도 했고 『꼬마 요술쟁이 꼬슬란』 『네가 하늘이다』 『컴퓨터 나라의 왕자』같은 동화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윤희 씨의 말을 들으면 외모와 전혀 다르게 천하에 다시없이 느긋하다. 그리고 참으로 삶을 살지게 산다. 얼마나 느긋하면 자기 인생의 5시간 29분을 춘천 호반에 덜렁덜렁 달리면서 버릴 수 있을까. 기가 막히고 깜짝 놀랄 만하다. 2002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춘천 국제 마라톤 42.195㎞ 풀코스를 완주했던 것이다.
“그냥 뛰었어요. 천천히….”
마라톤을 이야기하며 생글거리는 웃음 속에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숨어 있다. 교통 통제 한계 시간인 5시간 30분보다 다행히 1분을 앞서 있어서 당당히 경찰차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느긋함은 부지런함과 통하는 것 같다. 그리고 부지런함은 그것이 곧 미인이 되는 길인지도 모른다.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는 매일 새벽 자유공원에서 에어로빅으로 몸도 만들고 또 인천대공원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인으로 활동하며 잠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결코 성급한 뜀박질이 아니다. 이 교수는 느긋한 달리기를 통해 자신을 벚꽃 잎 같은 미인으로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런 여성을 전에 만나 본 적이 있나.
“뭉치 륜자예요. 이런 글자 쓰는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획수는 적어도 이런 어려운 ‘侖’ 자를 이름에 넣어 주신 이는 틀림없는 할아버지이실 것이다. 그러나 여교수는 자기 이름의 ‘륜’ 자를 이렇게 재치 있고 재미나게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옆방의 친절한 남자 교수는 ‘꽃 뭉치 륜’ 자라고 거든다. 시적이다.
실제로야 ‘둥글 륜’자, 혹은 ‘조리세울 륜’자인데 둥글다는 의미를 뭉치로 둘러말한 듯싶다. 그것을 또 꽃 뭉치라고 말하는 재능대학 아동문학과 교수들의 재능이 재미있다. 한 번 더 돈뭉치라고 말하며 웃는 여자. 그런 재주가 내게도 좀 전해졌으면.
이윤희 교수는 서울 토박이다. 자랄 때 이쁜 용모 때문에 잡지 표지 모델 같은 것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의 꿈은 작가였다. 그것은 부친이 못 이룬 꿈이기도 했다. 공무원이었던 부친은 한국전쟁으로 작가의 꿈을 접은 그런 분이었다. 그런 피가 그녀에게 흐른 것일까. 이 교수는 그것을 이루었다.
이 교수의 집은 어떨까. 가정에 대해서는 시원하게 입을 열지 않는다. 물론 털어놓을 이유도 없다. 책상 한쪽의 “부자가 되는 길”은 좀 뒤의 아들을 위한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는 “은은한 미소 7단계”를 거울에 붙여 놓고 매일 들여다본다. 그렇게 비슷한 연령의 남편과 초급 장교가 된 아들 하나가 그녀의 가정의 전부인 것을 알게 된다.
“군대에 있는 아들 빼고 두 사람 중에 하나라도 편하기 위해 과천에서 인천으로 왔거든요. 이제 인천서 살래요.”

이 교수의 방은 교수실이 아니라 동화 속이다. 고구마를 굽는 냄비 비슷한 것, 소리 지르듯 화분 속에서 희고, 붉게 목을 뽑은 꽃들, 벽에 걸린 꽃시계, 둥근 화환, 난초분, 초콜릿 바구니, 사탕그릇, 과자, 구석에는 언 빵이 들어 있는 냉장고가 자리잡고 있다. 그 언 빵을 A반, B반 아이들에게 가끔 먹이겠지. 녀석들은 행복할 것이다. 비록 얼음덩이라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뒤쪽 창문에는 녀석들 얼굴이 빼곡히 들어찬 사진 출석부가 붙어 있다. 좌우 양쪽 벽은 책꽂이다. 몇 백 권의 동화책이 죽 꽂혀 있어 마치 대여점 같은 느낌을 준다. 수백 권의 책이 그 두 벽과 책상 위, 그리고도 모자라서 공간이다 싶은 곳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상상력 덩어리들.
거기서 한 권을 얻어 든다. “이윤희 선생님이 인내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주는 책”이라는 『‘반허락’ 여우 우화』다. 그래 급하지 말자. 절대로 급하지 말자. 대여점. 상상력을 빌려 주는 이 가게에 가끔씩 들러 새 상상력을 조금씩 빌려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돌아가자. ‘눈이 닮은 영화 포스터’에 오래 시선을 주지 말고, 장미차 향기에도 코를 막고, 머리도 아프지 말고 돌아가자. 오늘밤엔 난데없이 꿈에서 무슨 ‘말아톤’을 달릴지도 모른다.
글 _ 김윤(시인·eoeul@hanmail.net / 본명 김윤식) / 사진 _ 김보섭 (자유사진가·ericah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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