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구원의 삶 염원하며 핍박과 박해를 견디다
구원의 삶 염원하며
핍박과 박해를 견디다
이달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찾는다. 교황의 방문으로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인천은 가톨릭의 역사가 깊게 배어 있는 도시다. 오랜 수난과 박해 속에서도 구원을 염원한 숭고한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복음의 꽃봉오리를 피워냈다. 200년이 넘게 이어 온 인천 가톨릭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
서구 경서동 ‘진펄이’ 숨은 신자들 동네
임금이 하늘이라고 여기던 시절,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가 인생을 결정하던 시절, 먹고 살기가 지독히도 팍팍했던 시절, 백성들에게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천주교는 어렵고 고달팠던 시대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구원의 상징이자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힘이었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몇 차례의 지독한 박해를 겪는다. 기오, 병인·병오, 신유박해가 대표적 사건이다. 이런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인천의 가톨릭신자들은 때로는 숨고 흩어져 살면서 신앙을 지켰다. 낮에는 옹기와 새우젓 장사로 생계를 잇고, 밤에는 기도와 교리를 외며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다. 서구 경서동 ‘진펄이 마을’은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나 질그릇을 빚으며 숨어 살았던 동네로 알려져 있다.
인천에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784년경으로 추정한다. 이즈음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이 일반인들에게 세례를 시작했다. 그래서 1784년을 한국 가톨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인천은 오랜 역사만큼 초기 조선 천주교를 이끈 선각자가 여럿 나왔다.
첫 영세자인 이승훈(세레명 베드로)은 참수당하여 지금 장수동(옛 반주골)에 묻혔고, 그의 아들도 박해를 당한 후 이곳에 안장됐다.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은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상황과 한국교회 실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탄원서인 ‘백서(帛書)’를 작성한 인물이다.
인천 신앙공동체가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1830년대 들어서다. 당시 인천에 살던 이루치아의 집에 남영혁(세례명 다미아노, 1802~1839)이 교리를 강론했다는 증언이 있다.
조선 말 일어났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사건은 인천에도 성인(聖人)을 탄생시켰다. 1839년 일어난 기해박해때 순교한 인천 출신의 민극기와 부평 출신의 김성임, 우술임이다. 이들은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답동성당 건립, 천주교 뿌리 더 깊어지는 계기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로 천주교 탄압은 전국적으로 참혹했고, 인천과 강화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천 가톨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은 1897년에 완공된 답동성당의 건립이다. 답동성당은 인천 최초의 성당으로 인천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공개적인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성당의 건립으로 천주교의 뿌리는 더 깊어졌다.
1961년은 인천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되어 대목구로 승격된 뜻 깊은 해다. 교구의 분리는 그만큼 인천에 신자와 교세가 커졌다는 반증이다. 대목구의 승격으로 독자적인 교계 제도의 설정과 활동이 가능해졌다. 현재 인천교구는 인천, 부천, 안산 일대를 관할하며 47만4천여 명의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교구 규모는 서울, 수원, 대구에 이어 네 번째다.
프란체스코 교황, 인천출신 신자에 ‘복자’선포
이달 14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교황은 이번 방문에서 가톨릭 교회가 공경하는 124명에 대한 복자(福者)를 선포하는 시복식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주재한다. 이번 124위 복자 중에는 인천출신 신자 두 명이 포함되어 있다.
복녀 이 안나(1841~1867)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충청도 서촌에 살던 교우 송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복녀 안나는 1866년 병인박해 후 체포되어 배교할 것과 고문에 시달렸으나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이고 순교했다. 그녀의 나이 27세였다.
복녀 심조이(바르바라, 1813~1839)는 인천 양반 집에서 태어나 20세 무렵 홍봉주(토마스)와 결혼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함께 살던 교우들과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고문의 형벌과 두 살짜리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고통 당하는 모습을 신앙의 힘으로 견디어냈다. 1839년 순교했고, 27세였다. 여성 순교자들의 이름 가운데 ‘조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많다. 당시 조이는 ‘과부 혹은 나이많은 여성을 점잖게 가리킬 때 붙이는 말’이었다.
- 첨부파일
-
- 이전글
- ‘안전’ 세계신기록대회 준비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