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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별 품고 믿음의 꽃봉오리 피워

2014-08-04 2014년 8월호

희망의 별 품고

믿음의 꽃봉오리 피워


 

인천 중구 항동에 위치한 제물진두는 인천 가톨릭의 아픔과 고난의 역사를 품은 성지다. 150여 년 전 종교와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자 했던 신자 10명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핍박과 박해가 거셌지만 구원의 신념을 오롯이 지켰던 숭고한 넋들이다. 150여 년 전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다. 인천엔 가톨릭 수난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현실의 구차하고 힘든 삶보다 구원을 꿈꾸었던 이들의 숨결이 성지 곳곳에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이름 없이 죽어간 순교자들을 기리다
한국 가톨릭은 200년이 넘는 역사를 거치는 동안 혹독한 박해를 몇 차례 겪었다. 그 과정에서 1만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강화도에 위치한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은 모든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원래 성지는 아니지만 교회가 의지를 갖고 성지로 조성했다.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고 사색하고 명상하는 공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오래된 숲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쭉쭉뻗은 나무, 잘 조성된 숲길에 예수 고난의 역사, 가톨릭과 관련한 다양한 상징들이 세워져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이곳은 국내의 유명한 가톨릭 성지의 모습을 재현해 방문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충북 제천 베론 성지, 다락골 줄 무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타고 온 거룻배 등을 볼 수 있다. 또 핍박과 박해시대에 옹기장사를 하며 생계를 잇고, 교우들과 정보를 나누며 신앙심을 지켰던 천주교인들의 삶도 옹기로 표현해 놓았다.
현양 동산은 ‘삶의 성지’다. 엄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다.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오르다 보면 이름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느껴진다.
위치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1486  문의 832-6318



답동성당 
120여 년, 민족의 아픔과 수난을 함께 겪다

인천 최초의 성당으로 1897년에 건립해 인천 가톨릭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성지다. 답동성당의 건립 의미는 신부가 상주하며 제대로 된 예배,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1897년 7월 성당 봉헌식이 열렸고,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광경으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천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90년 인천에 성당의 필요성을 느낀 파리 외방선교회 빌렘 신부가 현재의 땅을 매입했고, 이 과정에서 신자들로부터 모금운동을 벌여 성당을 세웠다. 땅은 당시 인천 감리 민선훈(세레명 요셉)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지만 기부받는 형식을 취했다. 성당의 종은 1900년 주로 항구에 사는 교우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주문해 들여왔다. 예전에는 제물포 본당, 인천 본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당은 종교적 성지지만 민족의 아픔과 수난사를 함께했다. 일제 말기 성당 종은 전쟁물자로 탈취당한 뒤 광복이 돼서야 돌아오게 된다.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때는 포탄을 맞아 천장이 뚫어질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성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1979년 창문에 설치됐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는 빛은 현란하게 아름답고도 장엄하다. 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고 벽돌조 로마네스코 양식의 건물이다. 건축 면적은 약 1천15㎡다.
위치 중구 우현로 50번길 2  문의 762-7613



제물진두 
10명 순교자들의 넋 오롯이 서려

제물진두는 인천지역 내 다른 순교지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된 곳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순교 터다. 이곳은 프랑스와 병인양요, 미국과 신미양요를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해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을 공개 처형한 장소다. 위치는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이 위치한 방향으로 해안성당 뒤편 벼랑으로 추정한다.
제물진두에서는 10명의 신자들이 처형됐다. 1868년 4월 15일 부평읍내에 살던 손 베드로 넓적이, 김씨(손 베드로 부인), 백치문(손 베드로 사위), 이 마리아 손자 등이 잡혀와 이곳에서 순교했다. 신미양요 전후인 1871년에는 이승훈의 증손 이연구, 이균구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국 함정을 살피다가 체포됐다. 그들은 배에 들어가 길을 안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해 5월 21일에는 이재겸의 부인 정씨, 김아지 등이 사학죄인으로 숨을 거뒀다. 
중구 항동 한중문화관 옆에는 1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고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제물진두 순교기념경당’이다. 이곳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부조가 붙어있고 기도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내부 천장에는 십자가 모양의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부착해 경건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제물진두는 순교지의 의미 말고도 김대건 신부가 신부 서품을 받기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렸던 장소이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외국인 수녀들이 첫 한국 땅을 밟은 곳이기도 하다. 제물진두 성지 위로는 해안성당이 자리한다. 54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성당은 원래 인천에 거주하는 화교들을 위해 건립했다. 처음 이름도 ‘선린화교성당’이었다. 화교들을 위한 선교 공간으로 시작했으나 1970년대 이후 화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신자 수가 줄어들었고 이후 ‘해안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위치 중구 항동 1가 5  문의 764~4191



갑곶순교 성지 
김대건 신부와 초기 외국 선교사들이 드나들던 바닷길
강화도는 서해안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 천주교가 일찍 전파된 곳이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된다. 이 때문에 병인박해 때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1866년 10월 14일 프랑스는 함대 7척을 강화도 근해에 정박한 후 이곳 갑곶진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점령하고 정찰한 후 강화부를 습격하여 각종 군기와 양식, 서적 등을 약탈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것이 병인양요다. 병인양요로 강화지방에서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1866년 박해를 피하지 못한 천주교 신자들 중 일부가 서울 양화진에서 참수 되었고, 1868년에는 강화출신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끌려나와 갑곶 나루터에서 순교했다. 병인양요 이후 관은 천주교도들이 이양선과 내통한다고 여겨 해안경계를 강화했고, 외세와 연락하는 자들을 ‘선참후계(先斬後啓)’ 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사학도의 무리’였고, 외세와 결탁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갑곶 해안은 김대건(세레명 안드레아, 1821~1846)신부와 초기 외국 선교사들이 드나들던 바닷길이기도 했다.
현재 갑곶순교 성지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의 과정을 신자들이 직접 체험 할 수 있도록 예수의 고난 14처를 조성하고 나무십자가를 메고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성지는 슬픔과 고난의 역사가 배어 있지만 주변 풍광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위치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4-2  문의 933-1525



이승훈 베드로 묘 
한국 최초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의 묘역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소지가 나와 있긴 하지만 초행길인 탓이 컸다. 교구에서 성역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묘역은 남동구 장수동 남동정수장 뒷길로 이어진 철담을 따라 산길을 10여 분 정도 걸어야 나타난다. 묘지는 단출했고, 길 중간 중간에 예수 고난을 담은 부조를 설치해 고난의 길을 간 선각자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묘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1756~1801)과 그의 아들 신규(마티아, 1794~1866), 택규(비신자)의 묘가 안치돼 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반대파들로부터 천주교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원흉으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참수됐다.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갔던 중국 북경에서 1784년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귀국하여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주었고 신자공동체를 형성시켰으며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를 창설했다.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성직을 임명하기 위해 운영했던 가성직 제도를 만들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위치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남동정수장 뒷산  문의 464-0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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