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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스러지면, 섬은 다시 섬이 된다
햇빛이 스러지면,
섬은 다시 섬이 된다
강화 북서쪽 바다에 닿을 듯 말 듯 머물러 있던 섬, 교동도. 그 섬이 세상 가까이 가까이 파고들고 있다. 다리가 놓이면서 육지에서 섬, 섬과 섬 사이의 간극이 메워진 것이다. 하지만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그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섬은 철조망을 두른 채 저 멀리 물러나 다시 혼자가 된다.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다리, 섬과 섬을 잇다
풍만하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짙은 해무로 뒤덮인 교동도 바다는 질펀한 갯벌을 드러낸 채 철조망을 두르고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강화도에서 불과 1.5㎞ 뱃길로 가도 15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섬은 아직 비밀스레 숨어 있다. 이 섬의 북쪽 해안선은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면서 황해도 연백 땅과 바다를 사이에 둔 남방한계선이 됐다. 그 역사의 상처가 이 땅의 시간을 멈추었고, 그렇게 섬은 낙도 아닌 낙도로 서쪽 바다 한편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섬이 세상을 향해 가까이 가까이 파고들고 있다. 교동대교가 개통하면서, 육지에서 강화 건너 교동도로 다리를 두 번 건너면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리 건너 교동도로 향하는 길목,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바다와 길 사이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긴장감이 흐른다. 그래서일까, 섬은 어서 오라 손짓하는 데 3.44㎞의 다리는 길게만 느껴진다.
가슴 먹먹한 역사의 땅
유배의 섬 강화도에서 또 유배된 섬, 교동도. 드넓은 들판과 숲에는 기나 긴 역사가 묵묵히 흐르고, 동네에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그라진 추억이 아직 일상으로 남아 있다.
막상 교동도에 발 디디면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잘 정돈된 논과 밭이 시야를 가득 메우기 때문이다. 원래 교동도는 세 개의 섬이었는데 고려시대에 섬과 섬 사이를 막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교동에 풍년이 들면 교동 사람들은 13년을 먹고, 강화도 전체 사람들은 3년을 먹고도 남는다’는 말이 있다. 기름진 평야를 품은 교동 사람들은 지금도 바다가 아닌 땅에 기대어 살아간다.
섬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가 흠씬 배어 있다. 교동도는 서해와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예부터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다. 남산포는 조선시대에는 수군을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고 중국과 일본 배가 쉼 없이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낡은 배 몇 척만이 지친 몸을 뉘고 있다.
교동읍성도 화려했던 지난 역사를 애처롭게 읊어내고 있다. 1629년 교동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곽은, 처음에는 430m 둘레에 동·남·북 쪽에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문의 홍예문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성곽은 마을의 담장이 되어 마른 푸서리 위에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북녘 땅이 보이는, 세상의 끝
화개산은 너른 품으로 섬을 아우르고 있다. 산에 오르기 전, 예스럽고 아담한 화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시대 때 창건한 사찰로, 고려 말기 유학자로 이름난 삼은(三隱) 가운데 목은과 이색이 머물며 수양했다고 전해진다. 산을 오르면 한 시간이 채 안 돼 정상에 다다른다. 끝없이 펼쳐진 수면 위로 강화도과 석모도, 볼음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휴전선 너머로는 아스라한 기억에 머물러 있던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섬의 북쪽 해안과 황해도 연백군 사이의 거리는 불과 3㎞. 저 멀리 바다가 욕심도 이념도 다 부질없다는 듯 태양 아래 넘실거리고 있다.
화개산 남쪽 기슭에는 유서 깊은 교동향교가 있다. 고려 충렬왕(1286년) 때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상을 들여 와 이곳에 모셨다. 시간을 거스르듯 홍살문을 지나 향교에 다다른다. 담백하면서도 고아한 멋이 흐르는 옛 건축물이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숲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더 내려가다 보면 잡풀이 수북히 자란 들판에 비석 하나가 오롯이 서 있다. ‘연산군 유배지’라고 새겨진 글씨가, 권좌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이곳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하다 31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번 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던 유배의 땅. 교동도에는 연산군 외에도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철종의 사촌 익평군, 광해군 등이 쓸쓸히 지내다 갔다. 그들에게 교동도는 슬픔의 빛깔로 도배한, 세상의 끝이었으리라.
멈추었던 시간을 깨우다
화개산에서 내려와 영산골을 지나면 교동도의 중심지인 대룡마을이 나온다. 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은 6,70년대를 연상시킨다. 교동이발관, 동산약방, 중앙신발, 대륭장의사, 붉은노을 호프치킨…. 구불구불 좁다란 시장통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세월의 흔적이 끈적하게 녹아 있다.
대룡시장은 6·25 전쟁으로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다 휴전선이 가로막으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북 사람들이 군에서 지원해 준 나무로 가게를 짓고 시장을 형성했다. 세월의 곱절이 자욱이 쌓인 낡은 슬레이트 지붕은 그 시절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얹은 것들이다. 그때의 시간은 지금도 일상으로 흐르고 있다. 시계방 할아버지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시계를 고치고, 사이좋은 노부부는 약국 아닌 약방에서 약을 팔고, 마을에서 유일한 이발관에선 여전히 분주함이 새어 나온다.
수평선 위로 뜨거운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다를 붉은 빛으로 물들인다. 교동도는 일반인에게는 일몰 30분 후까지 통행시간을 제한한다. 해거름 무렵 서둘러 다리를 건넌다. 이제, 이 길 따라 낯선 발길들이 이어지고 멈춘 듯 머물러 있던 시간도 깨어날 것이다.
다리를 건널 수록 점점 작아지는 섬. 파도가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바다에, 섬은 다시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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