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멈춘 시간 안에서, 그리움을 달래다

2014-08-04 2014년 8월호




멈춘 시간 안에서,

그리움을 달래다



잠시 머물다 곧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흘러 60여 년이 지났다. 돌아갈 수 있을까,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무른 시간이 깊어 갈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만 간다. 대룡시장은 북에서 온 실향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장사를 하면서 만들어졌다. 나지막한 집들이 다닥다닥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걷노라면 자꾸 달력을 들여다보며
날짜를 확인하게 된다. 멈추어진 시간 안에서 섬을 지키는 대룡시장 사람들을 만났다.

글 정경숙 본지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교동이발관
가위질 할수록, 소복소복 쌓이는 그리움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섬 교동도. 하지만 TV 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되면서 대룡시장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가장 출세한 건 ‘교동이발관’이다. 강호동과 은지원이 여기서 머리를 잘랐다. 방송을 보고 멀리 서울에서 두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러 오는 단골도 생겼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지광석(75) 할아버지는 전쟁을 피해 10살 때 교동으로 왔다. 곧 고향으로 갈 줄 알았는데 강산이 여섯 번 변했다. 할아버지는 1970년 이발관의 문을 열어 지금껏 가위질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 잠시 외양선을 타고 군 생활을 한 것 외에는 섬을 떠난 적이 없다.



“딸들이 인천에 사는 데, 가면 하루도 못 견디겠어. 여기는 죄다 문을 열어 놓고 사는데 거기선 문 열고 또 문을 열고 몇 개는 열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원. 아파트는 답답해.” 이발을 받던 동갑내기 죽마고우 전재순 할아버지가 말을 거든다. “어디 교동 만한 데가 있나. 자물쇠가 없는 마을인데, 다리가 놓여서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아 질 테니 이제 문을 잠가놓아야 하나봐.” 다리가 놓이면서 섬은 육지가 됐고, 육지인이 된 섬사람들에겐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향긋한 면도 거품 냄새 따라 소곤소곤 피어나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중앙시계수리방

멈춘 시계처럼, 맴도는 시간   
건넛집 시계수리방의 황세환(76) 할아버지도 대룡시장의 터줏대감이다. 3.3㎡(1평) 남짓한 가게는 두 사람이 들어가도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비좁다. 안에는 과연 고쳐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시계와 부품들로 그득하다. 할아버지는 동네 어르신들과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른 한낮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 특별한 말은 오가지 않는다.



“장사는 잘 되세요?”, “잘 되긴. 다리가 아파서 할 게 없으니까. 나오는 거지.” 답을 알면서도 질문을 드린 게 미안해진다. 교동에서 나고 자란 할아버지는 부모 밑에서 농사를 짓다 스물네 살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이후 육지에서 전자제품 고치는 기술을 배워 고향으로 와 시계방을 열었다. 의족을 찬 그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도나도 태엽을 감는 기계식 손목시계를 차던 시절에는 시계에 밥을 주느라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지금은 며칠 아니 한 달에 한 번 배터리를 가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찾는 이 없어도 항상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을 열어 놓는다. 시계바늘이 멈춘 시계처럼, 할아버지의 시간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동산약방

의원만큼 믿음직한 할아버지 약방   
이발관 가까이에는 ‘동산약방’이 있다. 약국이 아닌 약방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린 건물, 세월이 쓰다듬어 반질반질해진 약 진열대가 옛 시간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의환(83) 할아버지와 한사코 이름 밝히기를 사양하는 세 살 터울의 할머니는 이곳에서 50여 년 째 약을 팔고 있다. 섬에는 처음 다섯 군데의 약방이 있었는데, 약을 팔던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서 동산약방만 덩그러니 남았다.
“엄마 배 아파요. 약 주세요.” 멀리 바다 건너에서 시집 온 작고 까만 얼굴의 어린새댁이 서툰 한국말로 약을 사 간다. 섬에는 도시에는 흔한 종합병원 하나 없지만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약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얻고 안도한다.
“뭐 볼 게 있다고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겠어. 저기 처마 밑에 제비집 보여? 한동안 저 제비집에 사는 제비를 그렇게 찍어 가더라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비의 재잘거림이 들리지 않는다고 할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노부부는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뭍으로 보낸 딸은 뉴욕시립대병원 의사로 아들은 의대교수로 키워냈지만, 정작 당신들은 이 섬을 한 번도 떠난 적 없다. 하지만 언젠가 이들 부부의 생이 다하는 날, 교동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약방도 문을 닫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환하기만 한데, 그 미소가 아직 머물러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관광지 마냥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 온 사람들도 있다. 이정현(56) 아주머니는 3개월 전에 일산에서 교동도로 와 ‘나들목식당’을 열었다. 오빠들, 맛있게들 드셨어?”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동네 어르신들과 격이 없다.



“어디서 오셨수? 한잔 하지 그래.” 전신제(69) 할아버지는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 온 교동도 토박이다. 여기만큼 깨끗한 땅이 없다며 또 교동쌀 만큼 맛난 쌀이 없다며 한 가마니 집으로 보내 줄 수도 있다고 인심을 쓴다.




‘중앙신발’ 좌판에 샛노란 아이 고무신이 살포시 놓여 있다. 조가훈(72)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나고 10여 년 후에 서울에서 교동으로 왔다.  ‘세끼 밥 먹고 살면 됐지’. 교동도가 고향이나 다름없는 할아버지는 이 섬을 떠날 생각이 없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