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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로 아시아를 제패하다
사이클로
아시아를 제패하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자전거를 잘 탔던 소년은 이웃에 사는 의사 선생이 왕진을 갈 때마다 자전거 시합을 했다.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의사 선생을 한참 뒤로 따돌릴 만큼 월등한 실력이었다. 자전거 잘 타는 소년을 눈여겨본 의사 선생은 자전거 선수가 되기를 권유했다. 당시만 해도 자전거는 귀했고 인기는 최고였다.
이홍복(80)옹은 17세때부터 사이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인천운동장에서 연습을 했다. 선배들에게 지도도 받고 어울리며 자전거를 탔다. 그때만 해도 제대로 된 유니폼이 없어서 하의는 양키시장에서 내복을 사다가 염색을 하고, 윗도리는 하얀 러닝셔츠에다 빨간 천을 대서 유니폼으로 만들어 입었다. 비루하고 힘든 선수생활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이클 선수가 된 후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천m 신인대회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만 해도 인천선수들이 서울에 가서 좋은 성적을 내면 과거급제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이후에도 대구일보사 주최, 전국체전 등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전국적으로 기량을 뽐냈다.
힘든 선수생활이었지만 그는 운동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연습을 거르지 않았고, 그 결과 1958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아세아올림픽’에 대표 선수로 뽑히게 된다.
그는 이 대회에서 1등으로 골인했다. 2위하고 500m 이상 월등하게 앞서는 기록이었다. 전 국민이 환호했다. 그 당시 중계를 맡았던 아나운서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에 감격을 전했다. 같이 참여했던 우리나라의 다른 대표 선수들도 2, 3위를 기록, 모든 메달을 우리나라가 휩쓰는 진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단체전에서도 우승을 해, 그는 금메달 2관왕이 되었다. 그가 세계대회와 각종 대회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자 각 기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졌다. 운동선수로 유명해져, 편안하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운동선수는 운동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 거절했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 선수생활을 그만 둔 뒤로는 인천 사이클 감독, 전국체육대회 감독, 사이클연맹 전무 이사 등을 맡아 후진양성에 힘썼다. 자신이 직접 선수를 기르며 인천 사이클 발전에 기여했다.
이홍복 옹은 지금도 일요일이면 사이클을 탄다. 집에서부터 월미도~영종도~을왕리까지 60㎞ 거리다. 고령이지만 아시아경기대회 챔피언답게 아직은 거뜬하다. 그는 9월 열리는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 관심이 많다. 자신에게 영광을 주었던 대회가 인천에서 열리는 데 무언가 뜨거운 감동과 감격을 느낀다. 그래서 선배 선수로서, 인천 시민으로서, 인천선수들의 파이팅을 외치며, 대회의 성공을 강하게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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