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웃터골에서 인천AG까지

2014-09-03 2014년 9월호


웃터골에서 인천AG까지

글 강옥엽(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사진 인천시역사자료관, 대한체육회 제공


제4회 1962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근대 스포츠의 출발지, 인천
인천 개항 전인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쉬호가 한영수교 관계로 인천항에 들렀을 때 수병들이 상륙해 축구경기를 벌였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웃터골운동장이라고 추측하고 있고, 이것을 오늘날 한국 축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인천에 연고를 둔 시민프로축구단 인천 유나이티드의 활약은 이러한 축구의 시작과 무관하지 않다.
야구와 관련되어서도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야구가 들어온 것이 1905년인데, 그보다 6년 앞선 1899년, ‘인천영어야학회’ 일본인 학생의 일기에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을 통해 그 장소가 역시 웃터골운동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야구는 일제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들의 모임인 ‘한용단’과 ‘고려야구단’으로 이어졌고 ‘구도(球都) 인천’의 맥은 고교야구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인천고등학교와 동산고등학교가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전국 고교야구대회를 휩쓸었던 것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현재 SK와이번즈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 스포츠의 출발지 인천의 체육 발전은 광복 후,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에 이르기까지 5차례 전국체전을 개최한 것에서 찾아진다. 1964년 제45회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된 성화가 개회식 때 장창선 선수에 의해 점화되었던 1978년 제59회 전국체전, 직할시로 승격한 후인 1983년 치룬 제64회 전국체전은 컴퓨터가 처음으로 경기장에 선보여 과학체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광역시 이후 1999년 제80회 전국체전과 2013년 제94회 전국체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현재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를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백옥자 선수 등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선수단 거리 환영식

아시아경기대회의 연원
2014년 9월 19일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된다. 아시아경기대회는 191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극동선수권대회와 1934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서(西)아시아경기대회가 1949년 합병되어 부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경기대회 기간 중 아시아의 13개국 단장들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아시아지역대회 개최를 위한 사전 협의를 요청 받고 한국·필리핀·미얀마·인도·타이완·스리랑카 등 6개국이 모여 지역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1949년 2월 인도 뉴델리에서 제1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아시아육상경기연맹 결성을 합의했지만, 개최국인 인도의 사정으로 제1회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1949년 2월 9개국 대표 11명이 다시 모여 제2차 회의를 갖고 당시 인도 IOC위원인 손디(G.D.Sondhi)의 제안으로 지금의 대회명칭으로 바꾸고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조직하는 AGF(Asian Games Federation : 아시아경기연맹)를 창설했다. 그리고 1982년 AGF을 지금의 OCA(Olympic Council of Asia : 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창설하여 아시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한 대회를 4년마다 올림픽 중간 해에 주관해 오고 있다.


정창선 선수 세계 아마레슬러 재패 환영식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활약했던 인천 선수들
제1회 대회는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지만, 우리나라는 6·25전쟁으로 참가 할 수 없었고, 제2회 마닐라대회부터 참가해 3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활약했던 인천 출신 선수들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출전한 1954년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 레슬링에서 동메달을 수상한 임배영 선수는 당시 환영식이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리기도 했는데, 여기에 참석했던 장창선은 “가난해도 운동하면 꿈을 꿀 수 있다.”는 임배영의 환영사를 듣고 훗날 세계챔피언이 되었다고 한다.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사이클에서 개인 및 단체전 2관왕에 올랐던 이홍복 선수는 인천 사이클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린 인천 체육계의 대부로 지금도 사이클을 즐기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또 동메달을 수상한 김호순 선수, 1962년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 레슬링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장창선과 동메달을 획득한 최영길 선수가 있다. 여기에 1970년 제6회 및 1974년 7회 아시아경기대회 투포환에서 2관왕에 오른 백옥자 선수도 있다.
특히 장창선 선수는 광복 후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는데,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1966년 미국 톨레노 세계아마추어 레슬링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해 광복 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를 통해 ‘레슬링 강국 코리아’의 명성이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사이클의 김호순 역시 아시아경기대회 외에도 1952년 헬싱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하여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는 기개를 보였다.
‘아시아 투포환의 여왕’ 백옥자 선수는 한국 여성 최초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특히 2회 연속 아시아경기 제패라는 쾌거를 기록하는 등 우리나라 여자 육상계의 선구자였다. 당시 그녀가 경기할 때마다 내지르는 ‘우∼앗’하는 괴성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당시 국내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기합소리가 한때 유행할 만큼 인기가 최고였다.
이밖에도 배구에서 변경자, 문용관 선수가 아시아경기대회 및 올림픽에서 동메달과 은메달을 수상하면서 인천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사이클의 김호순 선수

또 한번의 도전, 개척 정신의 계승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 민족운동의 터전이 되었던 ‘웃터골운동장’으로부터 4차례의 전국체전을 치루었던 ‘숭의종합경기장’ 시대를 거쳐, ‘2002년 월드컵 16강’의 신화를 이루었던 ‘문학경기장’에서 2013년 5번째 94회 전국체전을 끝내고, 이제 서구에 마련된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및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인천은 비류의 미추홀 개척에서부터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최에 이르기까지 203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 선조들이 역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극복해 왔듯이 인천 체육의 발자취도 끊임없는 도전과 개척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 정신을 바탕으로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와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천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