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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다
장애,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다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를 맞아 인천에 뿌리를 두고 장애를 극복한 큰 인물 3인을 다시 조명해 본다. 장애를 겪으며 오히려 더 예술혼을 불살랐던 검여 유희강, 자신도 치명적인 장애를 앓으며 동료 환자들의 자립과 갱생에 온 몸을 바쳤던 시인 한하운, 그리고 점자를 만들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준 송암 박두성. 비록 이들은 이제 이 땅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사랑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은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유희강(柳熙綱, 1911~1976)
불굴의 예술 정신을 보여준 좌수(左手)의 서예가
유희강은 ‘추사 이후의 명필’이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검여체(劍如體)라고 부르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다. 뇌출혈로 오른손을 못 쓰게 되자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계속해 ‘좌수(左手)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며 불굴의 예술정신을 보여준 서예가다.
유희강은 지금의 인천 서구 시천동 진주 유씨(晋州 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유림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경학원 내에 설치한 명륜학원(明倫學院)에 입학해 1937년 졸업했다. 경성기독교청년회 외국어학교 중국어과에서 중국어를 수학한 후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년간 베이징 동방문화학회에 들어가 서예와 금석학을 연구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상하이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한구무한보(漢口武漢報)’, ‘남창일보(南昌日報)’ 등 언론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해 인천에서 대동서화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서울에 있던 중국어신문인 한성일보에서 잠시 편집일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0월 결성된 문총구국대 인천지부 선전국장, 1951년 문총 인천지부 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53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의 주선으로 시립도서관 사서를 맡아 전쟁으로 흩어진 책들을 수습해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도서관 뒷방에 제물포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김학수가 서실을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여기에 ‘선당(蟬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사람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곤 했다. 그는 1954년 이경성에 이어 제2대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동시에 인천박문여자고등학교에서 서예 교사를 맡기도 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재직하는 동안 주안 고인돌과 문학 고인돌을 발굴하였고 학익 고인돌 조사를 진행하는 등 인천지역 역사 유적에 대한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희강_1959년-문학산성-조사당시
유희강은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와 서예를 출품하여 모두 입선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국전에서 연이어 입선하였고, 1956년과 1957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이후 1959년 국전 초대작가를 거쳐 모두 6회에 걸쳐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고 1959년에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1964년 인천의 모든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인사동에 ‘검여서실(劍如書室)’을 마련해 글씨를 쓰는데 몰두했다. 그 결과 같은 해 제2회 개인전을 열 무렵에는 검여체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을 받았다.
점차 완숙한 예술의 경지에 다가서던 중인 1968년 9월, 유희강은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신체를 못 쓰는 불운을 당하였다. 서예가에게 오른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왼손으로 행서를 연습하면서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해 예서로 옮겨갔고 1971년 6월 회갑기념전을 열며 그 결실을 보여줬다.
이후에도 서체를 계속 개발해 1975년 ‘검여유희강좌수전(檢如柳熙綱左手展)’을 개최하며 왼손 서예가로서 다시 한번 그 위상을 알렸다.
검여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무척 좋아했다. 유희강의 대표작은 추사의 글을 써넣은 ‘남무아미타불’(1963년작)이다. 불탑을 쌓아 올리듯이 ‘남미아무타불’ 6자를 적고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써 넣은 것이다. 유희강의 회화적 일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72년 20년 동안 독창적인 작품으로 서예계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21회 서울시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1976년 10월 18일 뇌출혈이 재발해 사망했다. 저서로는 ‘인천의 안내?고적·명승·천연기념물’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남겼다.
한하운(韓何雲, 1920~1975)
한센인들의 자활사업을 이끈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은 ‘천형(天刑)의 시인’으로 불린다. 부평에 성혜원을 설립해 한센병 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시인이다. 그는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한태영이다. 한센병이 본격적으로 발병해 증상이 심해지자 과거의 자신을 지우기 위해 ‘태영(泰永)’을 버리고 ‘하운(何雲)’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여섯 살 때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그의 교육을 위해 가족 전체가 쌍봉리를 떠나 새로운 터전에 둥지를 틀었다. 1926년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32년 이리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과를 전공했다. 5학년이던 193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한센병 확진을 받았다. 이때는 이미 문학가의 꿈을 품고 시와 소설을 습작해 ‘조광’이나 ‘삼천리’ 등의 잡지에 투고를 하던 때였다.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도쿄로 건너가 세이케이고에 입학하였고 1941년 다시 중국으로 이동, 북경대학교 농학원에 합격해 축목과를 전공한 후 1943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함흥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취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센병 증상이 심해지면서 사직을 하고 집에 칩거하며 문학공부에 몰두했다.
광복이 되면서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해 군정을 실시하며 토지 몰수를 단행했다. 세습 지주였던 한하운의 집안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하운은 호구지책으로 ‘건국서사’라는 상호의 책방을 내고 아우와 함께 장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우가 반국가 음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함흥에서의 삶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함경북도 보안부에 끌려간 한하운은 모진 고문을 받고 한센병 증상이 악화된 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가택 구금 상태였지만 치료약을 얻기 위해 한탄강을 건너 월남을 단행, 서울을 비롯해 대구, 부산 등지를 돌며 약을 구했다. 그리고 다시 월북, 체포되어 재투옥되었다. 이감 도중 원산 감옥을 파옥하고 탈출한 한하운은 1947년 여름, 1개월여에 걸친 남행 끝에 비로소 서울에 정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문전걸식을 하며 지냈다. 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1949년 4월 잡지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 길’ 등 10여 편의 시를 투고하며 본격적인 시작(詩作)에 들어섰다. 같은 해 5월 정음사에서 출판한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는 그의 첫 시집이다. 시인으로 등단하자 한센병 환자 수용소 대표들이 찾아와 함께 살기를 원했다. 한센인들만의 집단부락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정부와 교섭하여 서울, 경기도, 강원도 일대의 환자들을 인천 부평공동묘지 골짜기에 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한하운은 1949년 12월 30일 밤, 70여 명의 환자들을 이끌고 부평에 도착해 요양소의 이름을 성혜원(成蹊院)으로 이름 붙였다. 요양소 식구들은 6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자치회를 결성해 한하운이 선거에 의해 자치위원장으로 선출됐다. 6·25전쟁 중인 1952년에는 신명보육원을 창설해 원장에 취임했다.
한하운_1950년대-신명보육원_신명보육원
그 무렵 부산의 한 주간신문이 ‘한하운시초’를 문제 삼아 한하운을 불온한 사상을 가진 ‘유령 시인’으로 몰아 간 이른바 ‘문화 빨치산 사건’이 터졌다. 이때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발표한 시가 바로 ‘보리피리’다. 한차례 사상검증을 거친 한하운은 1954년 6월 대한한센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1973년에는 한국가톨릭사회복지협의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과 치료에 노력해 갔다. 두 번째 시집인 ‘보리피리’(1955)를 발간하였고 그 외 ‘정본 한하운시집’(1964), 산문집인 ‘나의 슬픈 반생기’(1958), ‘황토길’(1960) 등을 발표하였다.
한하운은 1975년 2월 28일 인천시 북구 십정동 산 39번지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 장릉 공원묘지에 묻혔다.
박두성(朴斗星, 1888~1963)
훈맹정음 창안, 시각장애인들의 영원한 페스탈로찌
송암 박두성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시했다. 평생을 앞을 못보는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에서 태어났다. 교동 박씨 집안의 두터운 믿음 속에 서울로 유학 간 송암은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어의동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13년 현재의 국립 서울맹(盲)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에 뛰어들었다. ‘맹인’이라 불리며 사회적 천대를 받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응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두성은 시각장애인도 비시각장애인과 똑같이 직접 읽고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한글점자의 필요성에 주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점자는 19세기 프랑스 루이 브라이유가 종이에 점을 찍어 손가락 촉각을 이용해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 이외에 한글로 된 점자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식교육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기시하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의 한글점자 연구는 몹시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926년 11월 4일 박두성은 드디어 한글점자의 초창기 모델 개발을 마치고 한글점자 개발을 선포했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본 따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송암이 가장 먼저 한글점자로 번역한 책은 성경전서였다.
박두성-서울 제생원 맹아부교사로 재직 중이던 송암이 시각장애학생들에게 인체해부 실습교육을 시키고 있다
1935년 제생원 교사를 정년 퇴임한 그는 이듬해 인천에 설립된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해 한글점자 보급과 보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죽했으면 집안에 점자번역기 아연판을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한글점자 번역 작업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가 평생 점역한 책만 76점에 달한다. 영면 직전까지도 한글점자 번역일을 그치지 않았던 박두성은 1963년 눈을 감고 남동구 수산동 남동구청 옆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발췌: 인물로 보는 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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