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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에서 날아온 UFO 숭의벌에 앉다

2015-02-10 2015년 2월호


외계에서 날아온 UFO

숭의벌에 앉다


살짝 발뒤꿈치만 들어도 풍경은 달라진다. 늘 평지에서만 보던 거리나 동네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위성은 너무 멀고, 헬리캠(Helicam)은 너무 비싸다. 건물 옥상이나 교회 종탑에 올라가
인천을 굽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숭의로터리 부근 빌딩 위에서 도원산과 전도관 쪽을 내려다봤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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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인천축구전용경기장  ② 인천실내체육관  ③ 전도관  ④ 중앙여상(피병원)  ⑤ 광성고
⑥ 조일양조장  ⑦ 독갑다리  ⑧ 숭의자유시장  ⑨ 목공예거리  ⑩ 우각로마을


까치발을 든 지점 | 숭의동 정산빌딩 (남구 인중로5)        
숭의로터리 주변에는 큰 건물이 몇 채 있다. 대표적인 빌딩이 현대자동차인천영업소, 현대유비스병원 그리고 기호일보가 입주해 있는 정산빌딩(오른쪽 건물)이다. 이번에 까치발을 든 곳은 로터리 주변에서 가장 높은 정산빌딩(12층) 옥상이었다.




남구 숭의동 교차로에는 무려 여섯 갈래의 차로가 뻗어 있다.
차량이 물 흐르듯  갈 수 있게 오래전에 원형 로터리를 설치했다.
자동차들은 꼬리를 물며 눈치껏 제 갈 길로 갔다.
한때는 그 로터리를 돌아야만 도심에서 교외로, 교외에서 도심으로 오갈 수 있었다.
지금은 신호등으로 제어하는 로터리이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풍경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
정산빌딩 옥상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시야가
도원고개와 숭의운동장 그리고 전도관에 다다른다.



① 인천축구전용경기장 : 1934년 이곳에는 공설운동장이 들어섰다. 인천 사람들은 ‘그라운동장’(그라운드와 운동장의 합성어)이라고 불렀다. 세 번의 전국체전과 한 번의 소년체전을 개최했던 공설운동장은 2008년 6월 13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2012년 지하 3층, 지상 5층, 수용인원 약 2만 명 규모의 축구전용경기장이 문을 열었다. 현재 시민구단인 인천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다.   

② 인천실내체육관 : 그라운동장 시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산기슭에 모여 앉아 경기를 공짜로 즐기곤 했다. 사람들은 이 산을 ‘모모산’이라고 불렀다. ‘모모’는 복숭아의 일본말이다. 1976년 이 산 정상 부근에 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70년대 선인체육관과 쌍벽을 이루며 인천 체육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역도산’의 레슬링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번 시즌부터 인천 연고 여자 프로 농구팀인 신한은행 에스버드가 홈코트로 사용하고 있다. 




③ 전도관 : 한 종교단체의 예배시설로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지금은 비어있다. 한때 인천의 어느 곳에서나 한눈에 들어올 만큼 우람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전도관이 세워지기 전, 1890년에는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의 2층 별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계명학원을 세웠다. 광복 직후에는 서울의 한 대학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1957년 10월 박태선 장로가 대표로 있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전도관’을 세웠다.

④ 중앙여상(피병원) : 1954년 고 김응순 목사는 어려운 청소년을 위해 성경구락부를 세운다. 이후 보합고등공민학교로 되었다가 인천중앙여상으로 발전했다. 1921년 이 자리에는 전염병 치료 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병원의 이름은 피할 피(避)자를 쓴 ‘피병원’이었는데, 6.25전쟁 중 소실되었다.
  
⑤ 광성고 : 인천 광성고의 역사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는 부랑아들을 위한 직업소년학교(인천소년수양원)을 산꼭대기에 건립한다. 구두닦이 등 불우 청소년 약 500명이 모였는데, 교육은 물론 집 없는 아이들에게는 잠자리까지 제공했다. 이 수양원이 19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의 인천광성중·고교로 성장한다.



⑥ 조일양조장(터) : 조일(아사히)양조주식회사의 소주 공장이 1919년 10월 남한 최초로 개업했다. ‘금강표’ 상표가 붙은 이 회사의 소주는 만주, 사할린 등지에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고, 회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을 창단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광복 후 미군정의 양조 금지령 등으로 인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6.25전쟁 직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줄곧 비어있던 공장 터는 1978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위해 실내수영장으로 변신한다. 그 아래쪽에 있던 조일양조장 별관 건물은 1949년부터 2012년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주차시설이 되면서 완전히 헐렸다.

⑦ 독갑다리 : 도원동 언덕에서 숭의로터리 쪽으로 내려가면 일제강점기에 염전을 오가던 독갑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1916년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숭의공구상가거리에는 독갑다리의 유래 등이 적힌 비문이 세워져 있다. 한때 이곳은 인천에서 유명한 일명 ‘니나노 집’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선화동의 유곽이 폐쇄되면서 많은 창부가 이쪽으로 이동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중요한 손님 접대는 독갑다리 색시집에서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현재 독갑다리 일대는 크고 작은 철공소와 공구상들이 차지하고 있다. 



⑧ 숭의자유시장 : 숭의운동장 옆에는 ‘자유시장’과 ‘평화시장’이 마주 보고 있었다. 1970년에 지어진 숭의자유시장은 공설운동장의 재개발로 철거되었다. 1971년 문을 연 숭의평화시장은 초기에는 주변의 도원동과 숭의동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면서 번성했지만, 현재는 몇 집만 문을 열 정도로 그 기능을 거의 잃었다. 올해부터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 공간으로 거듭난다.



⑨ 목공예거리 : 숭의동 철로변에 가면 나무 냄새가 난다. 경인선 철길을 따라 목공예 관련 업체 30여 곳이 모여 있다. 목공예점은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고 목공점은 주로 문짝과 창문틀 등 큰 물건을 만든다. 대부분 30년 넘는 가게로 처음에는 배다리에 터를 잡았으나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원동을 거쳐 이곳 숭의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다시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은 특화 거리가 되었다.



⑩ 우각로문화마을 : ‘숭의동 109번지’는 한때 그곳에 사는 거주민들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15년 이상 끌어온 재개발 계획이 진도를 나가지 못한 채 동네 절반은 빈집이 되었다. 점점 슬럼화하던 중 예술인들이 하나둘씩 마을 주민이 되었다. 빈집이 공예방으로, 영화 제작소로, 작은 도서관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하면서 ‘우각로문화마을’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이 마을은 제1회 대한민국지방자치박람회 우수 향토 자원 30선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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