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책은 양식糧食이고, 인생이었다”
“책은 양식糧食이고, 인생이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이라면 누구나 헌책방에 대한
기억 한둘쯤은 갖고 있다. 성공을 꿈꾸던 젊은이는 법전을,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고 싶던 젊은 엄마는 과학 전집을,
빠듯한 용돈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던 중·고교생들은 문제집을 사기 위해 헌책방을 드나들곤 했다.
인천에서 학창 시절 또는 젊은 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나 배다리 헌책방에 대한 추억이
한두 움큼씩은 가슴에 남아 있다.
글 이용남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 관련 동영상 보기 클릭
1960~80년대, 배다리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세무서 사이에는 헌책방들이 빼곡했다. 30곳이 넘었다. 삼성서림도 그중 하나로 헌책방 시대를 열었던 초창기 멤버였다.
이진규 할아버지(77세)가 배다리에서 서점을 연 것은 29세 때였다. ‘인천전기’에 다니다가 친구의 아버지가 헌책방을 하는 것을 보고 직장을 그만둬버렸다. 헌책방에서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는 친구 아버지의 헌책방에 들어가 한동안 일을 배웠고, 삼성서림을 개업했다. 당시 헌책방은 주로 피란민들의 생계수단이었다.
장사는 순조로웠다. “주말에는 배다리가 사람들로 새까맸어. 헌책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니까. 초·중·고 교과서 묶음은 바로바로 팔려나갔지.”
바지런한 그는 매일 새벽 오토바이를 타고 고물상을 돌았다. 가정에서 고물상에 내놓은 헌책을 수집하고 일일이 손질해 서가에 꽂았다. 그는 책을 보는 ‘눈’이 좋았다. 책을 보면 당일에 팔릴지, 일주일 후에 팔릴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한문을 잘 몰라 보물을 챙기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고르고 남은 책들은 청계천에 무게로 팔아넘기곤 했는데, 그중에 고서 더미가 많았거든. 그중엔 분명 엄청난 보물이 숨어있었을 텐데 말이야.”
할아버지는 4개월 전 현역에서 은퇴했다. 더 이상 일을 하기에는 나이도, 건강도 받쳐주질 않아서다. 헌책과 동고동락하며 청춘을 보낸 지 47년 만이다. 사람들은 비록 그를 ‘책 장수’라고 불렀지만, 그는 헌책과 함께한 반평생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인재를 키워낸 지식의 창고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는 또한 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쓸모를 갖기 때문에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현역에서 떠나기는 했지만, 올해 그는 책과 관련해 작은 소망을 갖고 있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을 맞이해 인천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책과 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배다리가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 첨부파일
-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