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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2002-11-05 2002년 11월호


 

추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는 추석날 차례 상에 올릴 과일이며 음식 장만할 재료들을 사러 장을 보러 가신다. 어머니는 십여 리 길을 걸어 장을 보고, 광목 자루에 울룩불룩 붉은 홍옥이며 밤, 대추, 조기며 동태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가르마 같은 가을 들녘 길을 헤치며 집으로 오신다.
유년시절 나는 누런 벼가 고개 숙인 논을 홀로 지키는 허수아비 곁을 지나 방아깨비, 메뚜기, 풀무치 뛰던 길을 달려 온갖 맛난 것들 머리에 가득 이고 오실 어머니 마중을 갔다. 신나게 뛰는 발걸음 소리에 포르르 놀라 달아나는 새떼들….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허수아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수아비가 두 팔을 흔들며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아마 허수아비도 나처럼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이제 저 수수밭을 지나면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이 길로 오실 것이다.
영락없이 그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 품에서는 늘 어머니 향기가 났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하다. 뭐든 다 용서해 주시고, 어머니 손끝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모두 다 만들어지니까….
‘워이∼ 워이’ 참새 쫓는 소리는 가을 들녘을 깨우고, 누렇게 고개 숙인 벼이삭 사이로 허름한 아버지의 옷을 입고 거기 논에 허수아비가 서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가을이 되면 결코 외롭지 않았다.
나도 허수아비처럼 똑같은 포즈를 하고 허수아비 옆에 나란히 서보았다. 나도 허수아비? 아니 허수였다. 허수아비는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농부를 애태우는 얄미운 참새는 쫓지 않고 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무표정하게 오는 이 가는 이 바라만 보고있을까?
정녕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비록 소리는 지르지 못하지만 참새가 날아들면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 볼 것이다. 그렇다! 허수아비는 그저 헛 모양새만은 아니었다. 그토록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무한한 생각의 나래로 달려가라고, 작고 사소한 것들은 한 점 미련도 갖지 말고 훌훌 다 잊어버리라고 가끔씩 내게 무언의 말을 들려주던 허수아비…
아! 그때 고향 들녘의 허수아비가 그립기만 하다. 이 가을에 나는 어떤 허수아비일까?
        
김판길 (남구 주안 8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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