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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기지로 해적 소탕

2002-11-05 2002년 11월호


 

흥해 배씨가 덕적도에 들어간 때는 서기 1532년, 시조로부터 15대조 원길 공께서 을미년 1536년 3월 11일 충남 괴산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셨는데 부인 김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전란지에서 멀리 각자 피난을 떠난 보낸 후 자신은 자결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둘째 손자인 배세장 공이 단독으로 입도(入島)하여 소야도에 안착하시었으며 현재 덕적도에서 13대에 이르고 있다. 덕적도 제 6대조인 본인의 증조부가 덕적면장으로 재직 당시에 있었던 해적대 출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증조부가 면장으로 봉직한 때는 한일합방 이후인지라 시국이 매우 어수선한 과도기였다. 그때 소총으로 무장한 해적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들은 구한말 일본군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은 병졸들로 군대해산 때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삼삼오오 모의하여 해적단을 조직해 중부해안 도서지방을 돌며 주민들을 구타하고 협박하여 물품을 강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같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면장은 관선을 이용해 인천경찰서에 해적대의 일을 상세히 서면으로 보고하려 했으나 해적선에 남아 망을 보던 해적에게 발각돼 관선은 추격당해 공문서와 각종 세금을 강탈당한 후 선원은 수개월 간 거동을 못할 정도로 구타당했다. 
면장은 관내 유지회의를 개최하고 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한 후 시행세칙을 발표했다. 그리고 직접 해적대를 찾아가 그간 저지른 강·절도 행위를 깊이 반성하고 약탈한 물품을 반납하고 용서를 빌면 선처하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과시하며 듣지 않았다.
면장은 소탕작전을 하기로 하고 참가할 사람을 요구하니 각 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해적대는 밤에 진리의 당산으로 미리 대피하였다.
면장은 토벌작전을 진두지휘했으나 첫날부터 사건이 터졌다. 수색 작업을 하던 중 남기용이 칡덩굴에 숨어있던 해적 한 명과 눈이 마주쳐 소리치는 순간 두 세발의 총탄이 그를 쓰러트렸다.
해적대는 총 22명이었는데 그들은 군대식으로 행동한데다 녹음 짙은 5월이라 수색작업은 쉽지 않았다. 수색작업이 장기화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 일찍 끝났다.
대장을 따르는 사람이 11명, 부대장을 따르는 대원이 9명이었는데 부대장 쪽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쌍방간 총격으로 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들 중 3명은 새벽에 숨을 거두었으며 현재의 덕적중고 운동장 옆 송정에 매장했다.
섬 청년들은 해적선을 나포하려고 했으나 배에 남은 2명이 완강하게 저항해 실패했다. 작전을 바꿔 음식과 술을 장만해 해적대를 초청했다. 면장을 비롯해 유지들과 10명이 같이 동석을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불안해서 술을 먹지 않았으나 계속 설득하자 총을 든채 술과 음식을 먹었다. 한 두잔 먹은 술로 해적들이 점점 취하자 면장의 지시로 청년들이 달려들어 포박해 누구나 볼 수 있는 살구나무에 묶었다.
해적선에 남아 있는 나머지 2명은 청년들이 총을 보이며 ‘너희 대장이 잘못을 사과하고 너희를 기다린다’고 하자 순순히 배에서 내려왔다.
어려운 시기에 면장은 헌신적인 노력과 용기 그리고 기지로써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난국을 타개했다. 본인은 증조부님을 존경하며 자부심을 갖고 이를 소개하는 바이다.
        
위 글은 옹진군 덕적면 진리에 사는 배승연 씨가 보낸 기고문으로 지면관계상 정리해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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