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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후 1시 오류동에서 만나 우편낭 맞교환

2001-05-22 1998년 9월호
우리나라의 우정역사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고종 21년(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왕의 칙령에 의해 우정총국이 설립됐고 그해 11월 17일에는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개원, 서울보다 먼저 우편 업무가 개시되면서 인천우체국은 사실상 우리나라 우정업무의 효시가 된다.
초대 분국장으로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임명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 월남이 우정총국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홍영식과 함께 신사유람단에 동행했던 인연인 듯 싶다. 당시 인천분국은 인천항 감리서 안에 설치돼 경인지역의 우편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됨에 따라 인천분국도 자연히 없어지고 만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1895년에 국내우체규칙을 제정해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고 우선 경인간의 우편사무를 재개했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인천우체사는 처음에 외리 226번지, 현재의 경동 조흥은행 자리에 설립했다가 그후 1898년에 내리(현 내동) 103번지에 새로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고 한다.
당시의 우편업무는 전신업무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장돼 마침내 1900년에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하여 외국 우편도 처리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일본은 인천이 개항되면서 자국민의 진출이 늘고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그들의 편익을 위해 1884년 인천 주재 영사관 내에 독자적인 우편국을 두고 업무를 보았다. 고종25년(1888년)에는 서울 주재 공사관에 인천우편국 출장소를 두고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우편업무까지 담당하기에 이른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인들도 일본우편국을 종종 이용, 그 덕을 본다.
1896년에는 영사관 구내에 새로운 청사를 짓고 우편저금, 외국환, 소포 업무 등 오늘날과 같은 본격적인 우편업무로 확대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한국의 통신기관을 점유할 것을 모색하다가 광무9년(1905년) 한일통신합동운영협정을 체결, 마침내 우리나라의 우체업무를 강제로 접수했다. 이때 인천우체사도 일본 영사관 구내의 인천우체국에 흡수되고 만다.
그후 1923년 중구 항동 현위치에 청사를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인천우체국 건물은 지난 198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될 만큼 서양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인천지역의 문화유산이다.
경인선 열차가 개통되기 전에는 우편물 수송은 전적으로 '사람의 발'에 의해 이뤄졌다. 초창기에는 우편물의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전인(郵傳人)'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우편낭을 메고 1시간에 십리 정도의 속도로 걸어 다녔다.
경성 인천간은 매일 한번씩 우편물을 보내되 매일 오전 9시에 각각 한성우체사와 인천분사를 출발해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오류동에서 오후 1시에 만나 우편낭을 교환했다. 우편낭과 우체함을 개봉하고 서로 우편물을 교환하는 시간은 30분. 교환 후 다시 각기 우체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5시 30분까지 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경인간의 우편물을 교환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8시간 30분이었다.
서울 인천간 우편물이 수송되면서 우편물을 노리는 도적들의 무리가 자주 출현했다. 그들은 권총이나 칼로 무장하고 돈이 될 만한 우편물을 강탈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우편물보호를 위한 철통경비가 우체국의 주 업무이다시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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