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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기 경동네거리는 시네마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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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예술사는 협률사(協律舍)부터 시작된다. 협률사는 한 세기 이전인 1895년에 세워졌다. 1908년 이인직에 의해 개관된 원각사는 물론 1902년 조선황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인 협률사(協律社 인천의 협률사와 한자가 다름) 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
협률사는 당시 인천의 갑부 정치국이 세웠다. 그는 부산출신 떠꺼머리 총각엿장수였는데 인천에 와서 큰돈을 벌고 지금의 애관극장 터에 창고처럼 생긴 벽돌집을 지어 각종 공연무대로 사용케했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다. 날마다 '박첨치', '흥부놀부전'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창극이나 신파연극 심지어는 아직 명맥이 유지되고 있던 남사당패의 공연도 있었다.
당시 이곳을 중심무대로 활동했던 주안출신 배우 서일성의 명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 자자했다고 한다.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하기도 했다.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이름이 '축항사(築港舍)'로 바뀌었다가 1926년(일설 1924년 5월 혹은 1915년경)에 '애관(愛?)'으로 다시 개명됐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한국인 경영으로는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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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우리나라 영화예술의 꽃을 피운 토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애관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연주회장으로도 명성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애관극장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관객에 대한 사은품행사를 했는데 1등은 백미 1표(俵), 2등은 광목 한필, 3등은 약주 1승(升)이었다.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됐다. 한편 지금의 신포동 외환은행 자리에는 '표관(瓢?)'이란 또 다른 공연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1909년에 세워진 표관은 주로 일본영화와 뉴스를 상영했는데 객석은 800석 정도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좌석은 남좌여우(男左女右)로, 남자는 왼편줄에 여자는 오른편줄에 앉도록 엄중하게 구분했다. 해방 후 문화관(文化?)으로 개칭됐고 시에서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중 소실됐다. |
이밖에 중구 사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회전무대가 설치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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