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인천성냥공장 방문은 수학여행 코스의 하나
한때 인천하면 성냥공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군에 입대하면 정식군가를 배우기 전에 선임에게 먼저 전수 받았던 노래가 <인천의 성냥공장>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이었다. 야릇한 의미가 담긴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세대를 이어 불리워졌다.
그 노랫말처럼 실제로 인천에는 성냥공장도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성냥공장 아가씨도 분명 있었다. 성냥제조업은 인천의 산업을 일으킨 불씨였다. 개항 후 외국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생활필수품인 성냥의 수요가 급증했다. 1886년경에 인천에 첫 성냥공장이 생겨났고 1917년 10월에 국내최대 규모의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가 문을 열었다.
자본금 50만 원(圓)으로 지금의 동구 금창동 피카디리극장(옛 문화극장) 자리에 2000여 평의 터를 마련해서 설립했다. '우록표' '쌍원표' 등의 제품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한때 상시고용인원이 여자 300여명, 남자 100여명이 넘었다. 하루 평균 2만7천타, 연간생산 능력은 7만 상자로 국내 생산능력이 당시 국내 성냥소비량의 20%를 차지 할 만큼 성업이었다. 요즘 포철이나 현대자동차를 산업시찰하는 것처럼 서울이나 지방 학생들이 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을 수학여행의 코스로 삼았을 정도였다.
1920~1930년대 인천에 있는 성냥공장들의 생산력은 우리나라 성냥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고 일부는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천에서 성냥산업이 활황을 보인 것은 목재, 유황 등 원자재의 수입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개항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타지역에 비해 전력사정이 비교적 좋았다는 것이다. 원활한 공장가동을 위해 인천 최초의 변전소 시설이 이 지역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그 당시 성냥제조업은 완전한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다. 성냥개비에 인을 부치거나 성냥을 곽에 넣는 작업은 일일이 사람의 손에 의존했다. 성냥공장이 자리한 동네는 재료를 받아 밀가루 풀칠을 해서 성냥갑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이 번창했다. 공터나 골목어귀에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지천이었다. 공장 주변의 500여 가구가 성납갑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한 때 금곡리는 '성냥촌'을 방불케 했다.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던 일밖에 없었던 때인지라 성냥공장은 여성고용 창출에 한 몫 했으나 고용환경은 극도로 나빴다. '인천시사' 등 기록에 의하면 성냥공장의 여직공들은 1만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시간에 달할 정도였다.
해방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Zippo)라이터가 유행을 하면서 성냥의 가치도 떨어져 조선인촌회사도 60년대에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유엔표 팔각성냥, 기린표 통성냥, 비사표 갑성냥, 아리랑 성냥 등 전국의 300여개 업체에서 생산되는 성냥의 불꽃이 사그러들 줄 몰랐지만 이후 일회용 라이터가 생산되면서부터 성냥산업은 빠른 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수 십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성냥은 결국 라이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현재는 전국에 단 한곳에서만 성냥을 생산하고 있다. 성냥공장이 모두 없어진 인천에서는 이제 라이터가 불꽃을 키우고 있다. 현재 전국업체의 70%인 31개 사의 라이터 공장이 있는 인천은 라이터산업을 활성화 시켜 특화산업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 첨부파일
-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