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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총, 벌대총 길러낸 명마(名馬)의 고장
예부터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등을 살펴보면 말은 제주도가 아닌 인천의 국영목장으로 보내져 명마로 키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은 예로부터 인간생활과 아주 밀접한 동물이다. 교통수단, 통신활용, 농경보조, 전쟁수행, 그리고 스포츠 등 그 쓰임새가 다양했다. 고려 때는 인근국가와 외교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증여품으로 많이 사용됐기 때문에 태복사(太僕司)를 설치하여 양마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 시대에는 국영목장을 확장하고 말의 사육과 조달문제를 ‘국가의 최대 사업 중의 하나’ 혹은 ‘말의 생산이 국가의 부강을 가져온다’라고 할 정도로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천은 명마의 고장이었다. 앞 바다 섬을 중심으로 규모가 큰 국영목장이 많이 있었다. 개경 및 한양이 지척에 있어 해상교통을 통한 조달이 수월했으며 목초가 풍부하고 바다로 둘러싸여 방목하기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매음목장, 진강목장을 비롯해 길상·북일·볼음·주문·미법목장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매음목장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목장으로 고려 공민왕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을 이어온 목장으로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의 명마 여덟 마리 중 일곱 번 째 말 ‘사자총’을 길러낸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강화도의 진강목장은 경기도에서 가장 큰 목장으로 한때 1,500마리의 군마를 키웠는데 북벌계획을 세웠던 효종(1649~1659)의 애마인 ‘벌대총’을 키웠다. 효종은 말 사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제주도에서 혈통 좋은 말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명마로 길러내는데 힘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옹진 섬에도 목장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적도에 국영목장이 설치되어 국마 257필이 방목되었고 영흥도에는 성종 때부터 국영목장이 설치돼 선조(1568~1607) 때는 국마 119필, 목자 281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백령도에서는 하룻밤에 천리길을 달렸다는 서역지방의 명마들을 들여와 키웠는데 수시로 태복사의 관리들이 말을 점검하고 이 말들을 왕실에 진상하거나 전쟁용 말로 공급했다고 한다.
이작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많은 말들을 사육했는데 방목으로 키우던 말들이 자주 민가를 넘어와 해를 끼쳤다. 돌로 방벽을 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주민들은 그곳을 목장골이라고 부른다. 이밖에 자연도(영종도) 목장에서 1,500여 필의 말을 방목하는 등 장봉도, 신도, 시도, 모도, 선재도, 소야도, 문갑도 등에도 목장이 있었다.
부평 일대의 말과 관련된 이야기
섬 뿐 만 아니라 인천의 내륙에서도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평구 효성동, 청천동, 산곡동 일대의 벌판을 예전에는 ‘마장뜰’이라고 불렀다. 마장뜰은 마장(馬場)이 있던 곳을 일컫는 것으로 어르신들은 당시 면소재지인 청천동을 아직도 ‘마제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곳은 물이 부족해서 농사짓기에 부적합했고 말먹이로 좋은 억새풀이 뒤덮여 있는데다 천마산(현재의 철마산) 등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목장으로 아주 적격이었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재의 부개초등학교 일대를 옛날에는 ‘마분이’라고 불렸다. 마분이는 말무덤이라는 의미가 담긴 마을이름이다. 인근 목장이나 원(院)에 있던 말들이 죽으면 이곳에 묻었다. 이를테면 말 공동묘지인 셈이다.
부평일대에는 말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전해져 온다. 천마산(天馬山)에는 말의 발자국처럼 둥글게 패인 마제석이 널려있었다. 이 마제석은 옛날에 용마가 밟은 발자국이라고 한다. 가정동 이씨 문중에 아기장사가 태어났는데 날개가 달려있어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방안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나라에 후한을 끼친다고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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