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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에서 해양강국의 깃발 올리다
2001-09-03 2001년 9월호
구한말 서구의 열강들은 군함을 앞세우고 한반도 연안에 빈번하게 출몰했다. 대원군의 10년 섭정을 끝내고 정치 일선에 나선 고종은 무엇보다 해양강국을 지향하고 해군력 증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를 위해 1893년 2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근대식 해군 편제로 전환시키고 청주에 있던 통어영(統禦營·지금의 작전사령부 격)을 남양으로 옮긴 뒤 그 명칭을 해군통어영으로 바꿨다.
이어 조선정부는 해양 강국인 영국에 도움을 청한다.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관을 통해 영국정부에 군함을 제공해 줄 것과 해군군사교육을 위해 영국 해군장교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당시 동북아 정세와 강대국간의 이해 관계가 얽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결국 군함 도입은 수포로 돌아가고 우선 해군 창설의 기초가 되는 해군사관학교 설립만 착수한다.
같은 해 3월 해군사관학교 설치령을 공포하고 강화도 갑곶진 근처, 현재의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교사를 신축한다. 이때에 들어간 돈 1천 원은 청국에서 차관형식으로 빌렸다.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명칭은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 당시 영국 및 미국의 관련자료에 의하면 ‘Royal Naval Academy’ ‘The Naval School’ 등으로 기록돼 있다. 굳이 번역한다면 ‘왕립 해군사관학교’라고 부를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는 사관후보생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했다. 우선 10월에 영국으로부터 민간인 영어교사 허치슨이 파견돼 18세부터 26세 사이의 양반자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관후보생 과정을 대상으로 영어교육부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 해군 퇴역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각각 부인을 동반하고 강화도에 도착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고종은 그들에게 강화읍 관청리 소재의 한옥과 그에 딸린 3,000평의 땅을 하사했다. 그들은 매일 말을 타고 10리 길을 출퇴근했다. 강화도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이 거주한 이 가옥은 후에 성공회 측에서 매입하여 현재의 성공회 대학의 전신인 신학원(1914년)을 설치한다.
그러나 부국강병의 꿈을 안고 시작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1894년 1월의 동학혁명과 8월의 청일전쟁의 발발로 조선 조정은 해군사관학교 운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관들은 조선정부의 무관심 속에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무엇보다 설립 초기부터 갖은 방해 공작을 펴온 일제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후 조선의 해군제를 강제로 폐지해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싹도 제대로 틔워보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게 되었다. 학생들은 허치슨 교관을 따라 한성영어학교로 간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육군으로 군복을 갈아입었다.
이어 조선정부는 해양 강국인 영국에 도움을 청한다.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관을 통해 영국정부에 군함을 제공해 줄 것과 해군군사교육을 위해 영국 해군장교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당시 동북아 정세와 강대국간의 이해 관계가 얽혀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결국 군함 도입은 수포로 돌아가고 우선 해군 창설의 기초가 되는 해군사관학교 설립만 착수한다.
같은 해 3월 해군사관학교 설치령을 공포하고 강화도 갑곶진 근처, 현재의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교사를 신축한다. 이때에 들어간 돈 1천 원은 청국에서 차관형식으로 빌렸다.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명칭은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 당시 영국 및 미국의 관련자료에 의하면 ‘Royal Naval Academy’ ‘The Naval School’ 등으로 기록돼 있다. 굳이 번역한다면 ‘왕립 해군사관학교’라고 부를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는 사관후보생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했다. 우선 10월에 영국으로부터 민간인 영어교사 허치슨이 파견돼 18세부터 26세 사이의 양반자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관후보생 과정을 대상으로 영어교육부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 해군 퇴역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각각 부인을 동반하고 강화도에 도착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고종은 그들에게 강화읍 관청리 소재의 한옥과 그에 딸린 3,000평의 땅을 하사했다. 그들은 매일 말을 타고 10리 길을 출퇴근했다. 강화도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이 거주한 이 가옥은 후에 성공회 측에서 매입하여 현재의 성공회 대학의 전신인 신학원(1914년)을 설치한다.
그러나 부국강병의 꿈을 안고 시작한 강화도 해군사관학교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1894년 1월의 동학혁명과 8월의 청일전쟁의 발발로 조선 조정은 해군사관학교 운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관들은 조선정부의 무관심 속에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무엇보다 설립 초기부터 갖은 방해 공작을 펴온 일제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후 조선의 해군제를 강제로 폐지해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싹도 제대로 틔워보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게 되었다. 학생들은 허치슨 교관을 따라 한성영어학교로 간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육군으로 군복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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