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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항에서 한국 축구 '킥 오프'
2002-03-07 2002년 3월호
1882년 고종 19년 6월, 제물포항에 영국군함‘플라잉피시’호가 입항했다. 영국군함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당시 만해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터라 관가의 허가 없이 상륙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선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두로 내려와 가죽 공을 발로 차며 놀기 시작했다. 한참을 차고 난 후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군졸들이 몰려가 그들을 배로 몰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쫓기는 와중에 공을 그냥 놓고 가버렸다. 이 때 멀리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공을 주워 영국인 승무원들이 하던 것을 흉내내며 공을 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축구사의 첫줄을 장식하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인 7월, 이번에는 또 다른 영국군함‘엥가운드’호가 제물포에 입항했다. 친선을 목적으로 들어온 이들은 한성(漢城)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관가에 요청했다. 인천부사는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고 조정은 이를 승낙했다. 한성에 들어간 승무원들은 훈련원 빈터에서 공을 찼다. 많은 주민들이 이들의 공차기놀이를 신기한 듯 구경했고 영국인들은 그들이 찼던 공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주었다. 영국인들이 떠난 뒤 사람들은 훈련원 마당에서 한 동안 공차기를 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축구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놀이가 있었다. 신라시대에 둥근 놀이기구를 차거나 던지는 ‘축국(蹴鞠)’이라는 경기가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다가 옷끈이 떨어졌다”라고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근대 스포츠를 빨리 접한 인천은 일제 강점기 때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에 모여 축구경기를 자주 열었으며 공차기를 통해 민족의 정기를 키워나갔다. 1920년대에는 엡윗청년단, 한용단, 인배팀, 율목리팀 등 축구클럽이 참가한 전(全)인천축구대회가 매년 열렸다. 간혹 상해학생축구단이나 일본 제 2함대 팀이 인천을 방문해서 국제경기 형식을 띤 게임을 치르곤 했다.
30년대에 들어서 당시 인천실내체육관 아래쪽 도원동에 위치하고 막강한 재력을 가진 조일양조장이 축구팀을 정식으로 창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초의 인천연고 실업팀이 생긴 것이다. 조일양조장팀은 1939년도 전국도시대항 축구대회 등 각종 경기에서 우승을 할 만큼 전력이 아주 막강했다. 1947년 정부가 축구대표팀을 구성해 중국 상해로 원정경기를 보냈는데 조일양조장 소속 선수들 대다수가 대표팀에 발탁될 정도였다. 이듬해에 열린 런던 올림픽 때도 대표팀의 주축은 조일양조장 선수들이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면서 조일양조장 축구단은 해체되고 만다.
전쟁이 끝나자 군부대를 중심으로 다시 한국축구가 발전해 나갔다. 해병대팀, 헌병사령부팀, 병참단팀, 1101공병단팀 등 많은 군 부대팀이 활동했다. 인천에는 HID라는 군부대 축구단이 생겼다. HID팀은 창단 되자마자 예전의 조일양조장팀 못지 않은 전력을 구축했다. 당시 가장 큰 대회였던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인천이‘한국축구의 발상지’라는 자존심을 이어나갔다.
승무원들은 선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두로 내려와 가죽 공을 발로 차며 놀기 시작했다. 한참을 차고 난 후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군졸들이 몰려가 그들을 배로 몰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쫓기는 와중에 공을 그냥 놓고 가버렸다. 이 때 멀리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공을 주워 영국인 승무원들이 하던 것을 흉내내며 공을 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축구사의 첫줄을 장식하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인 7월, 이번에는 또 다른 영국군함‘엥가운드’호가 제물포에 입항했다. 친선을 목적으로 들어온 이들은 한성(漢城)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관가에 요청했다. 인천부사는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고 조정은 이를 승낙했다. 한성에 들어간 승무원들은 훈련원 빈터에서 공을 찼다. 많은 주민들이 이들의 공차기놀이를 신기한 듯 구경했고 영국인들은 그들이 찼던 공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주었다. 영국인들이 떠난 뒤 사람들은 훈련원 마당에서 한 동안 공차기를 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축구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놀이가 있었다. 신라시대에 둥근 놀이기구를 차거나 던지는 ‘축국(蹴鞠)’이라는 경기가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다가 옷끈이 떨어졌다”라고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근대 스포츠를 빨리 접한 인천은 일제 강점기 때 웃터골(현 제물포고등학교)에 모여 축구경기를 자주 열었으며 공차기를 통해 민족의 정기를 키워나갔다. 1920년대에는 엡윗청년단, 한용단, 인배팀, 율목리팀 등 축구클럽이 참가한 전(全)인천축구대회가 매년 열렸다. 간혹 상해학생축구단이나 일본 제 2함대 팀이 인천을 방문해서 국제경기 형식을 띤 게임을 치르곤 했다.
30년대에 들어서 당시 인천실내체육관 아래쪽 도원동에 위치하고 막강한 재력을 가진 조일양조장이 축구팀을 정식으로 창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초의 인천연고 실업팀이 생긴 것이다. 조일양조장팀은 1939년도 전국도시대항 축구대회 등 각종 경기에서 우승을 할 만큼 전력이 아주 막강했다. 1947년 정부가 축구대표팀을 구성해 중국 상해로 원정경기를 보냈는데 조일양조장 소속 선수들 대다수가 대표팀에 발탁될 정도였다. 이듬해에 열린 런던 올림픽 때도 대표팀의 주축은 조일양조장 선수들이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면서 조일양조장 축구단은 해체되고 만다.
전쟁이 끝나자 군부대를 중심으로 다시 한국축구가 발전해 나갔다. 해병대팀, 헌병사령부팀, 병참단팀, 1101공병단팀 등 많은 군 부대팀이 활동했다. 인천에는 HID라는 군부대 축구단이 생겼다. HID팀은 창단 되자마자 예전의 조일양조장팀 못지 않은 전력을 구축했다. 당시 가장 큰 대회였던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인천이‘한국축구의 발상지’라는 자존심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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