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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첫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인천인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찬바람이 몰아 친 월요일, 이별의 눈물을 훔치며 남자와 아낙, 그리고 젖먹이 등 121명은 일본 여객선 겐카마루 3등칸에 몸을 실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와이. 한민족 미주이민 100년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겐카마루는 일본 고오베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해를 넘긴 일행은 1903년 1월 2일 전염병 보균자로 밝혀진 20명을 제외한 101명이 미국 국적의 증기선 갤릭호로 갈아타고 태평양을 건넌다.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수요일 새벽 3시30분 드디어 호놀룰루항에 입항했다. 여기서도 하와이 보건당국의 정밀검사로 안질에 걸린 것으로 판명된 4명은 다시 귀국조치 당하고 최종적으로 97명이 하와이 땅을 밟는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 이민 권장
독립국가였던 하와이왕국은 사탕수수농업이 크게 발달하여 국가경제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사탕수수농업의 구조상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해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을 수입해 운영했다. 하와이는 1900년에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미 정부는 하와이 인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이민을 제한하고 대신에 한국민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인협회 회장 비숍이 내한하여 정부와 이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하와이 노동이민의 실현에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역할이 지대했다. 의료선교사로 부임했던 그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으며 신임을 얻고 있었다. 뒤에 인천에 이민회사를 설립하는 데쉴러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가 되었고 알렌도 데쉴러의 이민모집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하와이 노동이민 정책이 결정된 후 정부는 유민원(綏民院)을 설립하여 해외이민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게 하며 이민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집조(大韓帝國執照)’라는 일종의 여권을 발행했다. 또한 당시 동양광산회사 인천 항만사원으로 일하던 데쉴러에게 이민 희망자 모집과 파송 대행 업무를 맡겼다.
데쉴러는 내리교회 근처에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한 후 서울과 인천, 부산 그리고 원산 등 항만에 지사를 두고 노동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그는 역이나 교회 그리고 외국공관 등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선전활동을 펼치는 한편 <황성신문>에 모집 광고문을 싣기도 했다.
사계절이 분명한 한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지만 일년 내내 날씨가 따듯한 하와이는 생활하기가 좋고 매월 지급되는 노임 16달러는 원화 64원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소득이라는 등 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민 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오고가는 길이 비교적 수월하였던 만주나 블라디보스톡 등과 달리, 하와이는 태평양을 건너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선 것이 교회이다. 감리교단에 속해 있는 내리교회의 존스(한국명 조원시)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존스는 신도들에게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가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냐”며 이주를 권했다고 한다. 교회 신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친지나 이웃들을 설득하게 했고 서울에까지 가서 하와이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고 한다. 그 결과 첫 이민선 사람들은 제물포, 부평, 강화 등 대부분 인천지역 사람들이었다. 특히 50여명은 내리교회 교인들이었고 20여명은 인천부두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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