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역사속에 묻혀가는 흔적들

2001-05-15 1999년 4월호

교형장(絞刑場)은 수감동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안내원 은 안 의사의 두 동생(정근, 공근)에 대한 얘기와 조카 안춘생 씨가 몇 년 전에 안 의사의 유골을 발굴하러 왔었다고 얘기를 해줬다. 안 의사의 유골은 공동묘지의 매장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지금까지 발굴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발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1934년 일본제국자들은 교살형장을 지금의 자리에 29평의 규모 2층으로 지어놓고 대 살육을 자행했다. 2층 한곳은 선판정(宣判庭)으로 여순형무소장이 사형집행을 선언하면 간수가 사형수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운 다음 수갑으로 결박하고 허리띠로 몸을 단단히 묶은 후 활판(活版 : 마루바닥 중 밑으로 여닫히는 부분)에 꿇어앉히고는 목에 밧줄(올가미)을 걸어 교살했다고 했다. 지금도 그 당시 교살에 사용했던 3개의 올가미와 3∼4개의 밧줄이 걸려있었다. 형무소의 의사는 사형수의 시체를 검사한 후 사망이 확인되면 시체를 반으로 접어 나무통(木桶)속에 넣고 뚜껑을 덮은 후 재소자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 공동묘지는 감옥의 동북쪽 1.5㎞지점 황량한 야산 비탈 모퉁이에 있는데 길이 90m가 넘는 도랑을 다섯줄로 쭉 파놓고 시체를 넣은 나무통을 하나씩 한 줄로 묻어 나갔다. 몇 년 후 시체가 썩은 후 다시 파내어 유골의 뼈는 버리고 나무통을 가지고 와서 다른 사형수의 시체를 넣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은 이 공동묘지에 수 1천만 명이 묻혔다고 전한다.

1945년 8월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항복하기 전날 밤에 감옥 안에서 비밀리에 수 백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때는 나무통 밑을 빠지게 만들어서 이 통에 시체를 넣어 공동묘지에 운반해서 시체만 구덩이에 파묻고 나무통은 다시 가져와 계속 사용하다가는 아예 시체를 마차로 실어다가 구덩이에 내던졌다고 안내책자에 기록돼 있다. 아직도 이 공동묘지에는 많은 인골과 나무통이 매장돼 있다고 안내원은 덧붙였다. 교형실 앞의 한 전시관에는 공동묘지가 복원돼 있다. 그곳에 실제 발굴한 유골이 들어있는 나무통을 6구정도 전시해 놓았다. 안내판에는 '해방 후 공동묘지를 발굴했을 때 5m 길이의 도랑에서 시체나무통 6개를 발굴했다. 지금 여러분이 보는 나무통은 바로 이 감옥의 공동묘지에서 실제로 발굴하고 여기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라고 붙여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면 러일전쟁 90주년(1904-1994)을 기해서 마련한 곳이 나온다. 러.일전쟁 당시 실제 사용됐던 대포, 지도, 비석, 자동차 등이 전시돼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나란히 전시된 양국의 대포를 자세히 보니 일본의 대포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성능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일본제국자들의 대학살을 자행한 사진 등을 다시보며 정문을 나오니 숙연하고 찹찹한 심정이 들었다. 여순감옥유적지는 역사적 교육장이기에 앞서 우리나라의 애국지사인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선생이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곳이지만 안내판 어느 곳에서도 한국어로 돼있는 것은 없었다. . 단제 신채호선생은 '역사는 아와 피아의 투쟁 즉 역사는 끊임없이 아와 피아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기록이다'라고 역설했다. 민족사학을 통해 애국의 길을 제창한 선생은 이곳에서 역사연구에 열중했으나 끝내 민족사를 체계화한 통사(通史)를 아쉽게도 쓰지 못하고 1936년 여순감옥에서 8년을 복역한 끝에 순국하셨다. 지금 이 감옥 어디에도 그분에 대한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아쉽게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