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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수도방위의 보루 관미성
20일 만에 함락한 백제의 성, 관미성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서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권 제 18)>에 광개토왕과 관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392년 7월에 광개토왕이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뺏았다.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공함(攻陷)하였다. 그 성은 사면으로 초절( 絶:가파르다)하고 바닷물로 둘려 있는데 왕이 군사를 일곱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만에 함락하였다.
'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를 국역한 이병도 박사는 "관미성은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백제성 이름 중의 각미성(閣彌城) 그것이 아닌가 한다. '각(閣)'과 '관(關)'은 글자모양도 비슷하고 음도 비슷하므로 혹 혼용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성이 지금 어느 곳인가에 대하여 나는 일찍이 경기만의 교동도에 비정한 일이 있다. 교동은 고구려 소유시대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다. '고목'은 '고마', '고무'의 사음(寫音)으로 '관미','각미'와도 상관이 있는 말인 듯 하며 더욱 그 지리로 보아 양자의 비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 섬의 유명한 '화개산성(華蓋山城)'은 후세의 개수를 많이 거친 것이지만 실상 백제, 고려 이래의 고성일 것이다. 목은 이색의 시에 '해중화개삽청천(海中華蓋揷靑天)'이라 함과 같이 험고한 곳이다.
'각미' '관미' '고목' 등은 이 화개의 고칭(古稱)일런지 모르겠다.
또 광개토왕의 백제방면 정토가 본 '사기'에는 차년조(此年條) 이후에는 더 보이지 아니하나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익(翌) 6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58성, 7백촌을 함락하고 그 도성(漢城)을 포위 공격하여 백제왕(阿華王)의 항복과 동시에 성밑 맹(盟)을 맺고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의 헌출을 받고 인질로 왕제(王弟)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환도하였다"고 역주하였다.
관미성 위치 주장-춘추전국시대
백제 수도 방위의 보루였던 관미성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여러 설이 제기 되고 있다. 이병도 박사를 비롯한 많은 사학자들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를 비정하고 있으며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인 교하(交河)의 오두성(烏頭城)으로 단정하였다. 그밖에 예성강 연안의 중류, 하구의 남안과 북안, 강화도 등 많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리학을 전공한 연구자는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즉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한 까닭과 지리적인 여건,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 및 영토, 관미성의 중요성과 입지적인 조건 등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문제가 보다 명확해진다.
백제침공의 원인 : 백제 제 13대 근초고왕 26년(371),
임금은 그의 아들 근구수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조금 후퇴하여 수곡성(水谷城-新溪) 부근에서 고구려와 상대하였다. 침공 목적지 : 371년 백제의 침공으로 전사한 고구려 제 16대 왕 고국원왕의 아들이 소수림왕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아우이므로 고국원왕은 광개토왕의 증조 할아버지인 셈이다.
따라서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 침공의 최종 목적지이며 실제로 하남 위례성(아차산성)까지 침공하여 백제의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았다. 국경선과 영토 : 광개토왕이 수군을 이끌고 관미성을 침공한 392년의 2년 후인 394년 백제군과 수곡성에서 전투한 것으로 미루어 평산군, 금천군, 토산군, 평천군, 배천군, 개풍군 등은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을 통해 육지로 고구려가 침공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공격군과 침공의 통로 :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었으며 광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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