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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바른 언덕 아래 국치國恥의 그늘이 있다
양지바른 언덕 아래 국치國恥의 그늘이 있다
살짝 발만 들어도 풍경은 달리 보인다. 까치발을 하면 보이지 않던 부분이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평지에서 바라보던 거리와 동네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위성은 너무 멀고 헬리캠(helicam)은 너무 비싸다. 그래서 올라갔다. 건물 옥상이나 교회 종탑에 올라 인천을 굽어보았다. 그 정도 높이에도 인천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이번호에서는 수인역 부근 한 아파트 옥상 위에서 율목도서관 밑 신흥동 쪽을 바라보았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① 신흥초교 ② 동본원사 ③ 송도중학교 ④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⑤ 해광사
⑥ 사이다 공장 ⑦ 인천부윤 관사 ⑧ 율목도서관 ⑨ 도립병원

까치발을 든 지점 | 신흥동 경남아너스빌아파트 (중구 서해대로 439)
수인역 부근에는 예전에 정미소 공장과 창고가 즐비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들로 이곳은 이웃 동네와는 풍경이 어딘가 달랐다. 이번에 까치발을 든 곳은 수인역 앞 경남아너스빌 아파트(29층) 옥상이다. 2005년 신축한 이 아파트 자리에도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흥동(新興洞)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과거의 일본인 동네 이미지를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동안 정미소,
적산(敵産)가옥 등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햇볕 잘 들고 앞이 시원하게 트인
이 동네에 많이 모여 살았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많이 사라졌지만 신흥동 골목을 걷다보면
여전히 일제 압제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① 신흥초교 : 1883년 일본인이 자신들의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아사히(旭)소학교’라는 이름으로 인천에 최초로 세운 학교다. 본관 바로 앞 정원에 회색으로 칠 포탄 3발이 안내판과 함께 전시돼 있다. 1904년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 자폭한 러시아함대에서 수거한 포탄이다. 일제는 처음에 이 포탄을 인천부청(현 중구청) 마당에 전시했다가 승전을 선전하기 위해 학교로 옮겨 놓았다. 6.25 전쟁 중 공산군은 인천지역 의용군을 이 학교로 강제 징집해 전선으로 보냈다.

② 동본원사 : 로얄답동맨션에 있었던 일본 사찰로 1885년 동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시작했다. 1892년까지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신흥초 전신)으로도 활동했다. 현재의 송도중학교 교내에 있던 서본원사와 쌍벽을 이뤘다.
③ 송도중학교 : 1906년 10월 3일 북한 개성 송악산 산지현에서 윤치호 선생이 ‘한영서원(韓英書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학교다. 6.25 전쟁으로 임시 휴교했다가 남한으로 피란와서 인천시 송학동(현 남부교육청 자리)에 남녀 피란 학생 500명을 모아 다시 문을 열었다. 1953년 일본인 절 서본원사가 있던 현재의 답동으로 이전했고 1970년 중학교와 고등학교(송도고, 옥련동으로 이전)를 분리했다. 1982년 ‘개성상인’ 동양화학 회장 이회림 이사장이 취임했다. 학교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 HID, 즉 북파공작원 사무실이 있었다.
④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 내동 감리서에서 1910년 9월 화정 2정목(신흥동 2가)에 신청사 대지 680평 건평104평 규모로 건립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재판소령을 개정한 결과 경성지방법원을 인천지청으로 개칭하고 관할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김포군, 강화군으로 확장했다. 1932년 재정 부담으로 폐청하고 등기소만 남겨 두었다가 1935년 옛 감리서 터에 신청사를 건축하고 이전했다. 인천지청 터에는 한때 항도실업학교가 들어섰고 현재는 중구노인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⑤ 해광사 : 1908년 준공된 일본 불교 사찰로 원래의 명칭은 화엄사이다. 본전은 해광사 대웅전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고 뒤에 있는 빨간 벽돌의 시왕전은 원래부터 있었다. 경내에 일본식 석물이 남아있고 정문 석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새겨진 글자가 써있다. 사찰로 올라가는 계단의 상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며 하부 계단은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을 철거하고 계단을 새로 만든 것이다. 6.25전쟁 때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 절에 정치보위부를 설치하고 우익계 인물을 닥치는 대로 체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잠시 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6.25 전쟁 중 전사한 경기도 출신 60여 영령 유해를 해광사에 봉영했고 최근까지도 그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⑥ 사이다 공장 : 해광사 부근에는 ‘동인당’이라는 골동품 가게가 있다. 이곳에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 공장인 일본인이 창업한 인천탄산수제조소가 있었다. 광복 후 이 공장은 (주)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다’라는 이름의 사이다를 생산했고 이는 훗날 칠성사이다로 이어진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사이다병 뚜껑 만드는 부업을 많이 했다고 한다.

⑦ 인천부윤 관사 : 부윤은 지금의 인천시장이다. 신흥동 1가에 인천부윤이 사용했던 관사가 있다. 지금은 외관이 다소 변형되었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일본풍의 자태를 풍기는 주택이다. 1966년 인천시장 관사(현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가 새롭게 세워지기 전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⑧ 율목도서관 : 신흥동 뒤쪽에 동네를 품고 있는 조그마한 산이 있다. 그 정상에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이 있었다. 이 자리는 일본인 정미업자 리끼다께의 저택으로 현재도 일본식 정원의 흔적과 여러 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1946년 이 자리로 옮긴 시립도서관은 6.25 전쟁 통에 책 5천권을 분실 혹은 소실했지만 전국에서 최초로 참고열람실을 개실하고 2층짜리 신관을 신축하는 등 한동안 전국 도서관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했다. 시립도서관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8년 말 폐관을 하고 율목도서관에 그 자리를 내줬다. 시립도서관은 ‘미추홀도서관’이란 이름으로 남동구 구월동에 새 터를 마련해 이전했다.
⑨ 도립병원 : 현재 인천보건환경연구원이 들어선 자리(신흥동 2가)에는 오랫동안 시립병원(현 인천시의료원)이 있었다. 시립병원은 1883년 개설한 일본영사관부속 관립 인천일본의원이 그 시작이다. 이 병원은 1936년 현 보건환경연구원 자리로 이전해 개원했고 광복 후 1948년 경기도립인천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7년 동구 송림동으로 이전해 현재의 인천의료원이 되었다. 신흥동 도립병원에는 한동안 경기간호전문대(가천대학교 전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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