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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귤 맛

2015-03-03 2015년 3월호

구운 귤 맛

글 이성재 수필가_인천문인협회



내가 사는 곳에는 지금도 오일장이 선다. 장이 서는 날은 숫자 끝자리가 2와 7이다. 이날이 되면 지금도 장터와 그 주변은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과 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나 역시 장이 서면 특별히 살 게 없어도 가끔 장 구경하러 가곤 한다.
어느 해 겨울 그날도 나는 장엘 갔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저녁에 먹을 찌개거리를 사고 장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상인들은 추위를 잊고자 난로 주위에 모여 있었다. 난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난로가 아닌 드럼통에 구멍을 숭숭 내어서 만든 드럼통 난로였다. 그런데 그 드럼통 난로 위에는 하나같이 귤들이 올리어져 있었다. 전에도 몇 번 보았던 광경인데 그날 또 본 것이다. 어떤 상인은 올망졸망한 귤을 가끔 뒤집기도 했다. 나는 귤을 골고루 익히기 위해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어떤 곳은 미처 뒤집지 못해 귤껍질이 조금 타기도 했다. 나는 시장을 돌면서 왜 귤을 구울까? 토마토는 굽거나 살짝 익혀서 먹는다는 건 알지만 귤을 구워서 먹는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맛일까? 귤을 구워서 먹으면….
필요한 것들을 대충 사고 마지막으로 된장 파는 가게로 가던 중 구운 귤을 까서 드시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귤이 뜨거운지 공놀이하듯 양손에 몇 번 번갈아 잡더니 까서 드셨다. 내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주머니가 웃으며 “뭐 줄까?” 하시며 진열되어 있는 야채들을 뒤적였다. 나는 웃으며 아주머니께 말을 걸었다.
“아줌마, 정말 궁금해서 여쭈어 보는 건데요. 도대체 그 귤 왜 구워서 드시는 거예요? 그리고 귤을 구워서 먹으면 어떤 맛이 나요?”
이 질문을 해 놓고 나는 잔뜩 기대를 했다. 과연 어떤 맛이라고 대답하실지. 귤을 구우면 뽀들뽀들해지나? 아니면 수분이 다 빠져나가 바삭해져서 고소할까? 아니면 쪼그라들어 그 단맛이 강하려나? 분명 어떤 다른 맛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렇게 귤을 난로 위에 올려놓은 거겠지? 분명 보통 귤 맛이 아닌 다른 어떤 맛이 있을 거야. 그 맛이 궁금해 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더니 아주머니는 조금 전 먹다가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던 귤을 다시 꺼내 한 쪽 먹으며 말씀하셨다.
“아무 맛도 안 나. 추워서 그냥 먹으면 이가 시리잖여. 차가워서 그냥은 못 먹어.”
내가 기대했던 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날따라 난 그 구운 귤 맛이 정말 궁금했다. 구우면 귤이 더 달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고구마도 삶은 것보다는 불에 구운 것이 더 단 것처럼 귤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돌아서 오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아주머니의 말이 참으로 이해가 갔다. 내 어머니 아버지도 살아생전 차가운 아이스크림 같은 걸 드리면 이가 시려서 싫다고 하셨다. 더군다나 한데서 겨울바람을 잔뜩 맞은 귤은 나이 드신 분들이 그냥 드시기에는 너무 차갑고 이가 시렸을 것이다. 그래서 귤을 굽는 것이 아니라 데우려고 드럼통 난로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를 못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귤을 시원하게 해서 먹는 게 더 맛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귤을 구워서, 아니 데워서 먹어야 할 정도로 차가운 것이 닿으면 이가 시리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씨 발레스 발레오(Si vales valeo)"
나는 이 말을 ‘시발레스 발레오’라고 발음하기 편한 대로 말한다. 이 단어는 “그대가 잘 있으면 나도 잘 있다”는 뜻의 라틴어다. 로마 사람들이 편지 끝이나 첫머리에 쓴다는 이 인사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시발레스 발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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