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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포구, 월미도, 싸리재… 인천은 문학의 무대였다
북성포구, 월미도, 싸리재…
인천은 문학의 무대였다
인천에는 문학의 꽃을 피운 문인들의 삶과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녹아 있다. 그들이 밤을 지새우며 창작활동에 몰입했던 장소, 태어난 집,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공간이 살아 숨 쉰다. 그러나 옛 문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세상이 바뀐 만큼 거리의 모습도 변했다. 옛 한옥들은 다세대주택이나 상가가 되기도 하고, 길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지번만이 문인들이 이곳에 거주했음을 증언한다. 공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문학을 고민하고 창작에 몰두했던 시간의 자취는 남아있다.
뭇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관찰하며 작품을 구상했던 문인들의 고고한 흔적을 따라가 보자.
글 이용남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자유사진가 일러스트 유사라

오정희 작가가 그의 작품 무대였던 차이나타운에서 포즈를 취했다.

‘중국인의 거리’ 유년시절의 기억, 창작 소재로
작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는 그가 어린 시절 차이나타운 인근에 살았던 기억을 기반으로 쓰였다.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 때까지(1955~1958) 약 4년간 인천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조양석유회사 인천지사로 발령받으면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작가는 인천에서 세 번 이사했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중구 중앙동 1가 19번지다. 차이나타운 내에 있는 ‘포그시티’ 자리다. 지금은 3층의 높은 건물이지만 당시엔 단층건물이었다. 선생의 집 앞에는 1978년 철거된 중화루가 있었다. 중화루는 거리가 가까워 자주 애용했던 식당이었다.
지난 4월 19일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오정희 작가는 어린 시절 차이나타운은 신비스러운 공간이었다고 기억했다. 주변에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세 들어 살고 있었고, 중국인들이 사는 집은 항상 문이 닫혀 있었으며 한국인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양공주들과 동거하던 미군들은 항상 누런 봉투에 미제 물건을 가득 담아오곤 했다고 한다. 미제 물건에서 나는 색다른 냄새에 항상 끌렸고, 흑인도 이곳에서 처음 봤다고 했다.
소설에 나오는 맥아더 장군상이 있는 자유공원은 작가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간혹 친구들과 대한제분까지 놀러가기도 했다. 당시엔 밀을 펴 놓고 말렸는데, 그 밀을 몰래 훔쳐 먹으며 놀았다. 밀을 오래 씹다 보면 껌이 됐다고 한다.
오정희 작가에게 인천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인천에서 보낸 유년기가 그의 감수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인천의 기억은 무궁무진한 창작의 소재가 되었다.
김동석이 거주했던 집. 송월타월 옆 건물로 추정한다. 차로 뒤편에는 아담한 마을이 형성돼 있다.
김동석, ‘해변의 시’ ‘낙조’에는 인천의 기억이…
인천을 사랑했던 문인 김동석(1913~?)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다. 유명한 해장국집인 ‘평양옥’ 인근으로 지금 남구 숭의동 403번지 일대다. 이곳은 1902년 이전에 매립이 되었고, 러·일 전쟁 때 군 막사가 있어서 군수물자를 활발히 취급했던 지역이다. 1910년 이후엔 염전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김동석의 생가는 터만 남아있다. 김동석은 1921년 3월 가족과 함께 인천부 외리 75번지로 이사한 뒤, 이듬해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했고, 1년 뒤 인천부 외리 134번지로 이사하는데, 두 곳 모두 싸리재였다. 인천부 외리 75번지는 배다리 사거리에 위치한 송월타월 옆 건물이고, 134번지는 배다리 사거리 방면으로 추정된다. 신혼집은 싸리재 인근 경동 145번지였다. 김동석의 부친 직업이 ‘포목잡화상’이어서 조선 상권이 형성된 이곳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석은 1942년까지 인천에 거주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상당수는 인천에서 썼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수필 ‘해변의 시’ ‘낙조’ ‘시계’ ‘토끼’ 등에는 아내와 함께 찾은 월미도, 어릴 적 싸리재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유섭 생가터로 알려진 동인천길병원. 표지석도 같이 있다.
미학의 대가 고유섭, ‘경인팔경’ 등 남겨
우리나라 미학의 대가 고유섭(1905~1944) 선생의 집은 용동 큰우물 주변으로 동인천길병원에 그의 표지석이 있다. 동인천길병원 자리가 그가 태어난 곳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문화관광해설사 장회숙 선생은, 성공회 100년사에 나오는 1893년 사진에 의하면 지금의 동인천길병원은 지대가 낮아 물이 드나들던 곳이어서 집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히고, 언덕배기 부근을 고유섭 선생의 생가 터로 추정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의 조부 고윤경의 직업은 상인이었다. 조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생모와 이별, 서모와 불화, 잦은 병치레로 성장기는 불우했다. 그는 결혼 후 1931년 서울로 이사하면서 인천을 떠난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약 26년간 우현은 시와 산문 등 여러 편에서 1920년대 인천의 풍경을 담았다. ‘경인팔경(京仁八景)’이 대표적이다. 인천에서 서울의 학교까지 경인선 기차로 통학하면서 겪은 계절별, 지역별 풍경과 소회를 시조로 풀어낸 작품이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재직하는 11년간 한국미술사 연구에 매진해 학문적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941년 6월 장인 이흥선에게 빌린 4천 엔으로 고추장사를 시작하지만 실패했다. 그 충격으로 지병이었던 간경화가 악화되어 1944년 사망한다. 옥련동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우현의 동상을 볼 수 있다.
함세덕이 청소년기를 보낸 금곡동 14번지. 지금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미서점 일대다.
화평동 생가, 검은 기와에 연륜의 자취가 느껴져
인천출신 극작가 함세덕의 자취는 화평동에서 찾을 수 있다. 냉면거리로 유명한 화평동 455번지가 함세덕의 출생지다. 조부 함선지는 객주업에 종사했고 개항 무렵 조선인 객주회 등을 조직해 외국상인자본의 유입에 대응했다.
화평동의 함세덕 생가는 아직 남아있다. 함세덕의 생가를 자세히 보려고 옆집 건물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지붕의 기와가 집의 연륜을 말해준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올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매우 큰 집이었을 것이다.
함세덕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금곡동 14번지였다. 여기서 인천공립학교(창영초등학교), 인천도립상업학교(인천고)를 졸업했다. 인천도립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1929~1934) 인천부 용동으로 이사했다. 금곡동 14번지는 배다리 헌책방거리다. 현재는 배다리 한미서적이 위치한 자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한 작품 ‘동승’은 1933년 여름 친구들과 금강산에 여행을 갔다가 고찰 마하연에서 본 사마승을 떠올리며 쓴 이야기다. ‘동승’에 나오는 가좌율은 인천 가좌동에서 비롯됐다. 이 밖에도 ‘신허구리’의 먼우금(연수구 일대), 배다리(동구 금곡동), 고목의 소부리(우각리 창영동), 수문통(수문통, 송현동) 등의 지명은 모두 인천에서 딴 것이다. 그의 서정극 중 ‘해연’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팔미도를 배경으로 한 유일무이한 작품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 억눌려 자취가 없어진 작가다. 친일의 오점에 월북 작가 낙인까지 찍혀 작품이 감춰졌기 때문이다.

<동승> 함세덕
일명 「도념(道念)」. 1939년도에 발표된 함세덕의 단막극.
화평동에서 남생이 집필, 북성포구가 창작의 무대
작가 현덕(1909~?)의 대표 작품 ‘남생이’는 인천항 주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도시 빈민의 삶을 어린아이 ‘노마’의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현덕은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과 가까운 대부도 당숙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숙 집안이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용강정이라는 곳으로 이주해 소년 ‘노마’가 등장하는 소설을 여러 편 창작했다.
현덕의 본명은 현경윤으로 ‘남생이’ ‘경칩’ 등의 소설을 집필했던 곳은 화평동 78번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이 현덕의 고모네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덕이 살았던 용강정은 인천항 개항 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당시만 해도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현덕은 1930년대 고모 집에 머물면서 남생이를 집필했다. 장회숙 인천문화관광해설사는 현덕이 그린 남생이 주무대를 일제강점기까지 외국인 묘지가 위치했던 북성포구 일대로 추정했다. 이곳의 풍광이 남생이의 무대 묘사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부두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덕은 고모집에서 창작활동을 하면서 북성포구 일대 부둣가로 노동을 하러 다녔을 것이다.
현덕의 고모 집으로 추정되는 화평동 78번지 집을 볼 기회를 얻었다. 현 거주자인 김진수(79)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준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1989년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데, 집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1914년에 지어진 11평의 작은 한옥은, 기와를 갈고 집안 시설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것 말고는 옛날 구조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부엌은 부뚜막 형태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불시에 찾아온 객들에게 1914년에 지었다는 건축증명서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집이 인천을 대표하는 문인인 현덕이 살았던 곳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남생이> 현덕
소설 <남생이>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작품이다. 주인공 어린이 ‘노마’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대한 분노와 비애, 그리고 일제강점기 비참한 사회현실에서 겪는 가족 내 삶의 문제와 갈등을 어린 시점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
현덕이 살던 화평동 78번지의 집은 100년이 넘었다. 외관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내부는 오래된 한옥구조 그대로다.
동구 금곡동 59번지에서 바라다본 주안염전 방향. 훤히 보였던 주안염전이 지금은 아파트 때문에 시야를 가리고 있다.

인천 금곡동 집에서 찍은 박경리 선생 가족 사진.(맨 왼쪽 박경리 선생, 남편, 딸, 아들, 친정어머니)
박경리 선생 ‘금곡동의 2년은 달콤했네’
현덕의 고모 집을 나와 송현동 수문통 골목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현재 중앙시장에 도착하면, 우리 문학의 거두 박경리 선생이 1948년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했던 거리가 나온다. 중앙시장 맞은편의 원조 배다리시장이다. 당시 이곳은 일제가 패망한 뒤 버리고 간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보따리, 노점상의 좌판이 쫙 깔렸다. 박경리 선생은 결혼 후 남편 김행도씨가 주안 염전의 관리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1948년 초부터 동구 금곡동 59번지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박경리 선생은 인천에서 보낸 2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책을 무척 좋아했던 박경리 선생은,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기고 간 헌책들을 읽으면서 문학적 감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 선생에게 헌책은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박경리 선생의 인천 거주 사실은, 배다리에서 헌책방 ‘아벨 서점’ 을 운영하고 있는 곽현숙 대표가 박 작가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다가 약력에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서 2년간을 살았다’는 내용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박경리 선생이 살았다는 금곡동 59번지는 지번만 확인될 뿐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다. 인천세무소 뒤쪽 일대가 금곡동 59번지 일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금곡동 59번지 일대 골목길을 걷다보니 옛 염전에 깔았던 타일들이 골목 한쪽에 남아 있었다. 이곳에 염전공장 사택이 있었고, 박경리 선생도 여기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엔 금곡동 59번지 고지대에서 주안 염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고층아파트들이 시야를 가린다. 새색시 박경리 선생이 남편을 생각하며 주안염전을 수시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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