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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길, 예인의 길 60년

2015-04-30 2015년 5월호


유랑의 길, 예인의 길 60년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칠순을 바라보는 예인의 몸짓은 절도가 있었고 다부지며 힘이 느껴졌다. 평생을 남사당의 상쇠로 관객들과 호흡하고 흥을 이끌어 온 삶의 이력이 몸에서 풍겨져 나왔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끝은 지긋하지만 여유로웠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상모를 돌리는 모습에선 진한 연륜이 느껴졌다.
올해로 예인의 길, 유랑의 길 60년을 맞는 지운하(68) 명인. 그는 1955년 초둥학교 1학년 때 풍물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아버지도 동네 풍물단의 상쇠였기에 풍물은 그에게 생활의 일부였다. 당시 지 명인이 살던 숭의동은 풍물로 유명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아이들을 풍물명인으로 키우기 위해 선생님을 모셔올 정도였다. 1959년엔 서울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팀으로 출전, 단체상과 개인 부문 전국 1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은 꽹과리 소리를 들으면 그저 시끄럽다고 하지만, 나는 그 가락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열두살에 남사당을 따라 나선 그다. 당시 남사당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던 최성구 선생님을 따라 전국 유랑의 길로 나선 것이다. 남사당을 따라 전국의 장터를 전전하며 연희를 선보였다. 기량을 키우기 위해 상모돌리기. 풍물, 버나(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 넘기), 어름(외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을 밤새워 연습했다. 인간대접 못 받고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지만, 좋아하고, 가고 싶었던 예인의 길이었다.
1969년 군 입대를 한 그는 베트남에 파병이 되어서도 ‘끼’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투식량인 ‘시레이션’ 박스로 장구통을 만들고 판초우의로 양쪽 장구 가죽을 만들어 치는가 하면, 철모엔 구멍을 뚫어 상모를 달아 돌리는 등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기예를 떨쳐 버리지 못했다.
눈물과 애환으로 얼룩졌던 외길 인생에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천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남사당이 민중의 예술로, 민족문화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전수교육자가 됐고,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지도위원이 되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남사당놀이를 선보이고 우리가락을 해외에 알렸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껴요. 전에는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가 남사당에서 꽹과리 치고, 상모를 돌린다는 사실을 창피해서 주변에 얘기하지 못 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민족예술을 지키고 보존하는 사람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거든요.”
그는 올해 유랑생활 60년, 예인 60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김덕수 사물놀이, 장사익, 이광수 등 내로라하는 국악 명인들과 함께하는 잔치다. 자신의 장기인 상모놀이를 비롯해 사물, 상쇠, 판굿 등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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