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모진 ‘옹이’ 박힌 부평벌

2015-04-30 2015년 5월호


모진 ‘옹이’ 박힌 부평벌

살짝 발만 들어도 풍경은 달리 보인다. 까치발을 하면 보이지 않던 부분이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평지에서 바라보던 거리와 동네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인공위성은 너무 멀고 헬리캠(helicam)이나 드론(drone)은 너무 비싸다. 그래서 올라갔다.
건물 옥상이나 교회 종탑에 올라 인천을 굽어보았다. 그 정도 높이임에도 인천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이번 호에서는 백운역 바로 옆 대주아파트 옥상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미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평공원과 신촌마을을 바라보았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① 조병창(造兵廠)·애스컴  ② 부평 신촌(新村·부평3동)  ③ 부평공원(80 정비부대)  ④ 미쓰비시 사택  ⑤ 원통이고개 전투  ⑥ 부평경찰학교



까치발을 든 지점 | 백운역 대주아파트 (부평구 십정동)      
1970년을 전후해 경인철로를 따라 부평구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고개에 구름이 하얗게 끼면 비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해서 ‘백운(白雲)’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백운주택’이 되었고 이곳에 생긴 전철역은 백운역이 되었다. 그 역 바로 옆에 우뚝 솟은 22층 대주파크빌아파트는 옛 조병창 터 신촌마을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다. 다행히 그날 오후 백운고개에 구름이 걷혔다.  

 
우리 산하에 사연 없는 땅이 어디 한 평이라도 있을까. 
부평은 굴곡진 근·현대사의 아픔을 품고 있는 옹이 같은 지역이다.
평화롭게 농사짓던 허허로운 벌판에 왜색풍이 몰아치더니 다시 양키 바람이 불어닥쳤다.
1939년 군수기지인 일본육군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섰고 광복 후 미군은 그 땅을 접수하고
남한 지역에 주둔한 미군들의 주요 보급기지인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얼마나 큰 터를 차지했으면 ‘시티’가 붙어 흔히 부평을 ‘애스컴시티’라고 불렀을까.
산곡동, 부평동, 청천동 일대에 넓게 자리 잡은 미군부대는 현재 부평구 행정구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① 조병창(造兵廠) : 1939년 일제는 부평벌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설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했던 조선 내의 대표적인 병기 공장이었다. 부평 조병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4천 정, 총검 2만 정, 소총탄환 70만 발, 포탄 3만 발, 군도 2천 자루, 차량 200량 등에 달한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곳에서는 선박 250척, 무전기 200조, 심지어 잠수정까지 만들어 냈다. 당시 이곳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들이 종사했다. 광복 후 이곳에 미국 애스컴부대가 주둔했다.



② 부평 신촌(新村·부평3동) : 미군 부대의 영향으로 기지촌 문화가 가장 먼저 자리 잡았던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미군기지 정문 앞 대로변에는 ‘그린홀’, ‘드림보트홀’ 등 클럽들이 즐비했다. 대로변 뒤쪽에는 ‘양공주’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거주하는 셋방이 몰려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양공주들이 살던 부엌과 다락을 갖춘 단칸방 네 댓개가 길게 늘어선 주택이 일부 남아있다. 클럽이 있던 건물은 주로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③ 부평공원 : 1997년 말까지 육군80정비부대가 주둔하였던 터다. 군사용 막사 58동을 철거하고 4년여에 걸쳐 공원을 조성하였다. 1970년대, 80년대만 해도 전철을 타고 지나치면 거대한 군 막사들과 탱크, 군용 차량 등이 목격되었던 곳이다. 공원 조성 전 한때 독일 회사가 테마파크를 추진하려고 인천시와 협의하기도 했다. 
 




④ 미쓰비시 사택 : 일제강점기 현 부평공원 자리에 ‘홍중(弘中)’이란 군수 공장이 있었다. 주변에 종업원 숙소가 수십 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부평 2동 일대를 ‘홍중(히로나카) 사택’이라고 불렀다. 이후 히로나까 공장이 미쓰비시(三菱)로 바뀌면서 사택 이름도 ‘미쓰비시 사택’ 혹은 ‘삼릉 사택’으로 바뀌었다. 줄처럼 늘어서 있는 모양 때문에 흔히 ‘미쓰비시 줄사택’으로 불렸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미쓰비시 사택 87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부평구는 지역발전위원회가 공모한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 프로젝트’의 첫 사업에 미쓰비시 줄사택이 선정돼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한다.



⑤ 원통이고개 전투 : 원통이 고개는 인천지하철 동수역에서 부평삼거리역에 이르는 길이다. 이곳은 6.25 전쟁 인천상륙작전 후 실제적인 첫 대규모 교전이 일어난 곳이다. ‘부평사’에 따르면 인천상륙 3일째인 9월 17일 아침 6시경 북한군 보병부대와 인민군 전차 6대는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 쪽에서 인천 방향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 위 산속에 있는 미 해병대 진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마지막 전차가 원통이 고개를 직각으로 굽은 큰 길을 꺾어 돌려고 하는 순간 미군은 로켓포로 전차부대를 공격했다. 전차는 전부 파괴되었고 인민군 보병 250명 가운데 200명이 사살되었다.



⑥ 부평경찰학교 : 광복 직후 미군정은 1945년 종로구 세종로 미 대사관 자리에 ‘경찰관 강습소’를 설립했다. 조선경찰학교, 국립경찰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8월 15일 국립경찰전문학교로 승격했다. 1955년 경찰학교는 현 부평6동 인천성모병원 옆으로 이전하며 부평시대를 열었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경찰관 양성을 하다가 경찰대학은 1984년 경기도 용인으로. 중앙경찰학교는 1986년 충주로 이전했다. 일제 말기에 박문여중학교(인천소화고등여학교)가 교사로 사용하다가 징발되기도 했다. 



※ 지난 4월호에 실린 (구)제물포구락부 설명에 대한 정정 전화를 받았습니다. 역사적인 이야기는 크게 틀린 부분이 없는데 현재는 중구문화원이 아니라 인천광역시문화원연합회가 입주해 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각 나라의 문화를 체험과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