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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막힌 ‘배꼽산 정상’ 시민 품으로 돌아온다
50년간 막힌 ‘배꼽산 정상’
시민 품으로 돌아온다
문학산은 인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둥지이다. 비류백제,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 유서 깊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1782년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도 그렇게 전한다. 인천 정신의 뿌리이자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학산
정상이 군부대의 주둔으로 50년간 폐쇄됐었다. 시민들은 군부대가 있는지도 모른 채 정상부 밑으로 조성된 등산로를 이용하며
문학산을 보았다. 인천시가 인천만의 가치 창조 실현 차원에서 문학산 정상부를 50년 만에 개방하기로 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의
민원과 여론이 맺은 결실이다. 개방일자는 10월 15일 인천시민의 날에 맞춰졌다. 문학산 정상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날을 기뻐하고
함께 축하하자는 취지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류재형 자유사진가
2천년 전 백제 역사의 흔적, 곳곳에 스며있어
‘산천(山川)은 의구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吉再)가 고려가 망한 후 고려의 도읍 송도를 돌아본 후 읊은 회고가이다. 문학산을 올라보니 왠지 이 시조가 생각났다. 고구려의 왕자 비류가 문학산 밑에 미추홀 백제를 세운 지 2천년이 지났고 산기슭, 능선, 산성엔 옛 백제의 역사와 흔적이 옹이처럼 남아 있지만, 백제를 세운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는 10월 15일에 문학산 정상부가 개방된다. 이에 앞서 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문학산 정상을 미리 밟았다. 시민들에게 개방행사의 의미를 알리고 인천의 뿌리를 간직한 문학산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자는 뜻에서다. 문학동에서 문학산으로 올라가다 보니 길 옆에 굳게 잠긴 철문이 보인다. 여기가 문학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공군부대 작전도로 초입이다. 차로 5~10분, 걸어서 20여 분 이면 정상에 닿는다. 보통 산 정상은 봉우리 때문에 암벽도 많고 가파르지만, 문학산 정상은 운동장처럼 평평했다. 옛 자료에 의하면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정상을 깎고 판판하게 조성했다고 한다. 정상은 노란 페인트칠을 한 타이어들이 담을 대신해 쌓여 있었고, 군막사, 포대, 진지 등 군부대 시설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1950, 60년대 문학산을 답사하고 사진을 남긴 이종화 선생의 ‘문학산’ 책에 의하면 정상에는 ‘봉수대’, ‘우물’, 임진왜란 때 부녀자들을 피난시키고 전쟁에 공을 세운 인천부사 김민선을 기렸던 ‘안관당지’ 등의 유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1997년 시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도 대략의 위치만 추정했다.
문학산 정상에서 인천을 바라보니 2천년 전 비류왕자가 문학산 아래 미추홀 백제를 세운 심오한 뜻을 알 것 같았다. 문학산은 장대하면서도 모든 것을 보듬는 어머니 품처럼 느껴졌다.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서울의 남산, 관악산부터 계양산, 인천대교, 연수구, 송도국제도시까지 인천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다시 남쪽을 내려다보니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남동구, 안산 시화호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인천은 물론 사방으로 서울, 경기도까지 걸리는 것 없이 전망할 수 있었다. 당시 금보다 귀했던 소금을 매개로 한 해상교류권과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도 발길 아래 있었다. 사통팔달의 길과 대지의 풍요로움, 해상권까지 갖춘 왕국 입지의 최적지였다.
1965년부터 정식으로 군 부대 주둔
인천 도심에 위치한 문학산은 1883년 개항 전까지만 해도 인천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역할을 했던 인천도호부청사도 이곳에 있다. 시유지인 문학산 정상부가 달라진 것은 1959년 갑자기 미군 기지가 들어오면서다. 봉수대가 사라지고 정상부도 깎였다. 문학산은 봉수대 때문에 배꼽산으로도 불렸지만 이후 그 이름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당시 윤갑로 인천시장은 ‘비록 국방상 불가피하였다고는 하지만 2천년의 이끼가 낀 갖가지 유물과 산성, 그리고 봉화대까지를 삽시간에 잃었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하기 그지 없다’며 애통해했다.
‘인천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김식만 선생(치과 의사)에 따르면 이곳에 있던 미군부대 이름은 ‘캠프 인터셉트(camp intercept)’였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차도를 남북 양쪽으로 개설하고는 정상을 깎아 레이더 기지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산 높이가 약 17m나 낮아졌다고 한다. 일제 때 지도를 보면 높이가 233m인데 지금 문학산 안내도에는 216m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시에서는 219m로 측정했다.
인천시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군부대가 정식 주둔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부터 1976년까지 미군 방공포대가 주둔했고, 그 후에는 우리나라 공군부대가 사용했다.
공군부대는 2005년 통제장비를 영종도로 옮겼고, 2011년에는 병력이 철수했다. 지금은 최소한의 근무자도 없이 군 시설만 남아있다. 하지만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는 탓에 인천시민 등 일반인 접근이 통제돼 왔다.
시민들은 정상은 볼 수 없었지만 정상 밑으로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문학산을 즐겼다. 문학산성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는 바깥 도심도 구경하면서 산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문학산성은 백제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둘레 577m, 평균높이 1.5m로 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호다. 미추홀 고성, 비류성, 남산석성으로 불리웠다. 시는 훼손된 성곽 일부 구간 160m를 2009, 2010년 약 2년에 걸쳐 보수했다.
전망대, 그늘막, 벤치 등이 설치, 낮 시간만 개방
문학산 정상부 개방을 앞두고 시설 및 주변 정비가 한창이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은 위장진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미사일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을 군사시설로 오인하게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유사 시 민간인의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시는 문학산 개방에 앞서 시민들의 편의와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한다. 정상을 메우고 있는 수풀의 제거 작업도 이뤄진다. 또한, 전망대와 망원경, 안내판, 벤치, 그늘막이 들어선다.
개방은 낮 시간대만으로 제한된다. 국가위기사태 발생이나 평상시 작전이나 훈련 때는 시민개방을 통제한다. 10월 15일부터 1단계를 개방하고, 내년 시설공사를 거친 후 군부대 전체를 공개한다. 1단계 시설물 공사를 조속히 끝내고 10월 15일인 인천시민의 날에 맞춰 개방한다. 시민한마당 축제도 함께 열린다.
문학산 개방은 인천시민의 오랜 숙원이었다. 산의 장대한 기운이 인천 전역으로 퍼지고, 인천의 가치의 부흥으로 이어지길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시민들은 문학산 정상을 걸으며 산의 정기를 받아 마음의 정신적 뿌리를 다시금 되새길 것이다. 문학산 개방이 인천 시민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0월 15일 문학산 개방 시민축하 행사
문학산 개방행사는 10월 15일(목) 오후2시부터 4시까지 열린다. 인천 역사의 발상지이자 상징인 문학산 정상부의 50년 만에 개방을 기념하는 간소한 의식행사로 치러진다. 10개 군·구 대표 풍물단의 사물놀이와 연날리기로 길트임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시장과 시민이 손잡고 문학산 정상을 오른다.
문학산에 표지석의 제막식과 정상부 개방을 알리는 고유제, 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리는 의식이 재현된다. 인천 발전을 축원하는 글을 담은 인천 희망 연날리기, 풍물단의 신명나는 축하공연, 개방축하 떡 나눔 행사 등도 열린다.
문학산 주변 유적이야기
문학산은 그 길고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유적을 담고 있다.
문학산과 영욕을 같이해온 유적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문학산성
문학산성은 시 지정 기념물 제1호로 보존해 오고 있다. 고성의 축조는 연대 미상이지만 백제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성 주위가 436자’라고 기재되고 있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뤄졌는데 외성은 약 200m의 석축이며, 내성은 약 100m의 토성이다. 현재 산성은 일부만 복원되어 있고, 서예가 검여 유희강 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던 ‘문학산성 동문’ 등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학산서원
문학동에서 삼호현으로 가는 중간 야트막한 들판에 학산서원 비석이 서 있다. 서원의 건립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영조 14년(1768년)에 국왕이 현액(간판)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
안관당지(安官堂址)
임진왜란 때 부녀자들을 미리 피란시키고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인천부사 김민선의 혼령을 모셨던 사당터이다. 안관당지에 대한 내용은 ‘인천부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1960년대 이종화 선생이 답사를 했을 당시는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성내에 사당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물
산성 동쪽 안관당 툇마당에 두개의 우물이 있었다. 높은 산마루에 있는 우물이었지만 그 옛날에도 언제나 물이 고여 넘쳤다고 한다. 그 우물이 어찌나 깊었던지 팔미도 앞바다와 맞닿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물맛이 짠 것이 탈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와 백성들이 왜적과 싸울 때 식수로 사용한 항쟁식수(抗爭食水)로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삼호현
문학봉과 서편 노적봉 사이의 잘록한 고개를 삼호현 또는 사모지고개라고 불렀다.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떠나려 바다를 이용할 경우 능허대에서 배를 타야 했다. 삼호현까지 온 사신 일행은 별리고개에 남기고 온 가족, 친지와 멀리 마주서서 마지막 이별을 했는데, 이때 세 번씩 큰 소리로 불렀다고 해서 삼호현이 되었다.
중바위
삼호현을 넘어선 산비탈에 구멍이 움푹 팬 바위가 서 있는데, 이것이 곧 중바위다. 그 옛날 어떤 중이 고개를 넘다가 하도 갈증이 나서 바위에 걸터앉아 ‘아우, 목이 탄다. 시원한 술이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난데없이 한 낭자가 바위 밑에서 공손히 술 한잔을 받쳐들고 권했다. 목이 타던 그 중은 덥석 받아 마셨다. 갈증이 가시니 이번에는 술보다 낭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다시 술을 청했으나 낭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바위의 움푹 팬 구멍은 그 중의 두 무릎과 양손 자국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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