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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초에 한 번, 가을 밤바다 빛으로 물들다
십 초에 한 번, 가을 밤바다 빛으로 물들다
인천은 168개 섬을 품고 있다. 모두 ‘인천만의 가치창조’에 기여하는 소중한 보물섬이다. 선미도는 등대섬이다. 이 섬 등대는 1934년 처음 불을 켠 이래, 지금껏 파도가 파랗게 달려드는 바다를 홀로 지켜왔다. 십 초에 한 번, 등명기가 돌 때마다 살차게 뻗어가는 빛줄기. 그 빛을 위안 삼아, 오늘도 섬의 밤이 깊어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등대섬
선미도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인천항에서 남동쪽으로 51.1 킬로미터. 육지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인 덕적도에서 불과 500미터 떨어져 있지만, 가는 배가 없다. 섬과 세상을 잇는 건, 덕적도와 선미도 사이를 간헐적으로 운행하는 행정선뿐. 섬에 주민이 살지 않아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운항하지 않는다.
덕적군도 바다 한편에 비밀스레 숨어있는 이 섬은, 세상 사람들의 발길을 쉬 허락하지 않는다. 선미도는 지형이 척박해 예부터 ‘악험도(惡險島)’라 불렀다. 섬 전체가 암석으로 이뤄져 있고 해변이 거칠고 절벽이 가팔라 사람이 다니기 쉽지 않다. 그 섬이 덕적도의 ‘예쁜 꼬리’라는 뜻의 선미도(善尾島)라는 이름을 얻은 건, 1934년 등대가 세워지면서 부터다.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등대지기 세 명이 머물고 있지만, 이 척박한 땅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없다. 한때는 열대여섯 가구 정도가 오롯이 살아가기도 했다. 대부분 6·25 전쟁 때 섬으로 온 피란민들로 거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거나 숯을 만들어 뭍으로 내다 팔며 근근이 살아갔다. 결국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하나둘 육지로 떠나고, 지금은 마을 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선착장에서 오르막길을 돌아 대나무 숲을 가로지르다 보면 당시의 시간을 좇을 수 있다. 다 허물어진 숯 가마터와 가축우리, 빈 우물터에 어떻게든 살아가려 했던 그네들의 흔적이 애처롭게 남아 있다. 옛 동네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낡은 집 슬레이트 지붕 위로 세월의 먼지만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모두 떠난 섬 지키는 등대지기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거리는 1.6킬로미터. 선미도 등대를 지키는 김은홍 소장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다. 모노레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걸어서 갈 생각이다. 높고 가파른 능선을 오르내리며 산 정상까지 올라야 하지만, 그는 엄연한 섬 사나이 아닌가. 거칠고 투박한 섬 길을 걷는 게 좋다. 섬의 온도는 육지보다 차다. 시월에 들어서면 벌써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위가 느껴지지만, 어느새 이마에 굵은 땅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마을 산등성이에 펼쳐진 초지에 다다랐다. 산턱에 털썩 주저앉아, 긴 호흡을 내쉰다. 그 뒤는 천 길 낭떠러지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이 목덜미의 땀을 한순간에 씻어낸다.
“선미도 바람은 참으로 정직합니다. 바람 세기만큼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그 폭만큼 파도가 일어나지요. 선미도의 바람은 흐르는 물처럼 결코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나를 늘 새롭게 하지요.”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김 소장은 오랜 세월 공직에 머물며 민원을 처리하는 업무를 해왔다. 하릴없는 일상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운명처럼 등대원을 채용하는 공고를 보았다. 등대는 그저 햇살, 파도, 바람과 벗하며 바다를 향해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소란스러운 도시생활을 뒤로하고 등대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섬에 오니 “과연 내 선택이 옳았나. 편리한 육지 생활에 길들여진 몸이 척박한 섬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처음에는 온 바다를 뒤덮은 해무와 세찬 바닷바람을 싸워 이기려 했다. 풍향계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잔뜩 끼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눈앞이 캄캄하고 견디기 힘들 만큼 온몸이 끈적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차례 보내면서 점차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갔다. 자연과 싸우는 대신 그들이 건네는 소리에 기울이게 됐다. 초록으로 돋아나는 보송보송한 잎사귀, 철 따라 고운 꽃망울을 터트리는 들꽃… 말없이 밀려갔다 오기를 반복하는 파도, 그 안에서 숨바꼭질하는 바닷말과 말똥성게, 애기가시덤불…. 도심에서는 무심히 스쳐 지났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게 됐다.
“섬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거친 자연 앞에 서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요. 문득문득 이 섬에서 평생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곤 합니다.”
밤이면, 빛으로 가득 차는 섬
섬에는 대자연이 벅차게 살아 숨 쉰다. 굽이굽이 펼쳐진 능선을 따라 소나무와 소사나무, 혼합 활엽수 군락이 울울하게 숲을 이룬다. 그 안 높다란 나무에선 황조롱이가 큰 눈을 껌뻑이며 인사하고, 해안 절벽에선 사슴과 흑염소가 신기한 듯 쳐다보다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곤 한다.
자연이 항상 살갑지는 않다. 때때로 거친 파도와 비바람이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친다. 특히 시월에 부는 하늬바람은 여간 매서운 게 아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면 닻을 올렸던 어선들이 급히 회항한다. 등대가 그 길을 열어 준다. 예고도 없이 마른 번개가 쳐서 등대지기들이 ‘심장’처럼 여기는 등명기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등대라 불리는 ‘항로표지 관리소’ 안은 늘 긴장감이 흐른다.
선미도 등대는 김 소장과 이정민 소장, 김진호 등대원이 함께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소장은 항로표지관리소의 업무를 총괄하고 남은 두 사람은 빛과 전파로 이뤄진 항로표지 기능을 유지하는 일을 주로 한다. 낮 1시, 밤 9시, 새벽 1시 하루 세 번 인근 무인표지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해양 기상을 관측하고 장비를 점검한다. 24시간 촉각을 곤두세우고 등대의 원격 감시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셋이 각자 제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또 하나처럼 움직인다. 모두 등대지기가 천직인 줄 아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섬의 밤은 육지보다 빨리 찾아온다. 해가 고운 노을빛을 흘리더니 수평선으로 사그라지고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등대지기가 등명기의 스위치를 올린다. 순간 번쩍이는 섬광. 살찬 빛줄기가 파도가 파랗게 달려드는 검은 바다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선미도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바다에 투영된 역사의 빛과 그림자 팔미도 등대
두 섬이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다 하여 팔미도라 불리는 섬. 그 섬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가 있다. 106년간 바다를 홀로 비추던 등대는 2009년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대는 190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만들었고, 6·25 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역사를 안고 있다.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댓불을 따라 빛과 그늘을 함께해 온 우리의 역사를 비추어 본다.
서쪽 끝자락에서 바다 지키는 소청도 등대
서쪽 바다 끝자락에 다다랐다면, 대청도 가는 길 바로 곁에 있는 소청도에 꼭 들려야 한다. 섬의 서남쪽에는 소청도 등대가 고고히 서 있다. 등대는 1908년 1월 1일 처음 불을 켠 이래, 밤 바닷길로 떠나는 배를 이끌며 어두운 바다를 홀로 지켜왔다. 등대 주변은 낚시터로 유명하다. 한두 시간 낚싯대를 드리우면 농어와 우럭이 쉬지 않고 입질을 한다. 등대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치도 예쁘다. 화창한 날이면 바다 건너 북한의 옹진반도까지 시선이 닿는다.
등대섬 가는 길
선미도는 덕적도에서 500미터 거리로 가깝지만 거주하는 주민이 없어 섬으로 가는 여객선이 없다. 그 때문에 덕적도에서 선미도를 오가는 행정선을 타거나, 덕적도 주민에게서 배를 빌려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소청도는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 우리고속훼리(www.urief.co.kr 887-2891∼5)를, 팔미도는 여객선 현대마린개발 www.palmido.co.kr 885-0001)을 이용한다.
문의 선미도 등대 831-4927, 소청도 등대 836-3104, 팔미도 등대 831-4925
인천만의 가치창조 ‘섬 프로젝트’
<섬, 숨이 되다> 발간
인천은 168개 섬을 품고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한 시간 거리에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와 168개 섬이 있다는 건, 인천에게 ‘축복’입니다. 모두 고유한 자연경관과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하고 무한한 잠재가치를 지닌 보물섬입니다. 시는 이 섬들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인천만의 가치창조’의 일환으로 ‘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에 시 대변인실은 인천 섬이 품은 매력을 널리 알리고 인천만의 가치창조에 기여하고자 단행본 <섬, 숨이 되다>를 발간하였습니다. 가깝고도 아름다운 바다, 168개 매력이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섬으로 오십시오. 삶에 쉼표를 찍는 여유와 넘치는 즐거움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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