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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진의 아픈 역사를 아시나요?
영종진의 아픈 역사를 아시나요?
140년 만에 햇빛 본다
영종도의 원래 이름은 제비가 많아 자연도(紫燕島), 즉 제비섬이었다. 얼마나 제비가 많았으면 섬 이름을 제비섬으로 붙였을까. 영종(永宗)의 한자 뜻은 ‘긴 마루’다. 지명에서부터 이미 활주로가 생길 것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2009년 영종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영종도는 오롯한 섬이었다. 만석부두에서 구읍배터를 오가는 배를 타고 다시 작은 종선으로 갈아타야 영종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종은 인천에 속한 작은 섬이지만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사건을 품고 있다. 1875년 9월 벌어진 운양호 사건 또는
영종진 피격 사건이다. 역사에 갇혀있던 운양호 사건이 현대로 걸어나와 재조명되면서 역사 복원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류재형 자유사진가
복원 중인 태평루
영종 주민들 ‘을해왜요(乙亥倭擾)’ 주장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작은 섬 영종에서 일어난 운양호 사건은, 아픈 역사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영종주민이나 관련 단체는 이 일은 단순히 사건이 아니라 신미양요, 병인양요처럼 일본인들이 저지른 침략 행위이기 때문에 ‘을해왜요(乙亥倭擾)’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양호는 강화도 초지진의 포격을 받자 보복 차원에서 초지진을 파괴하고 뱃머리를 돌려 영종진을 맹포격한 후 육전대를 상륙시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맨몸이나 다름없이 대항했던 영종진 수병 35명이 전사했고 16명의 포로, 그리고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여 정, 기타 막대한 군대 기물을 약탈당했다. 일본군들은 이것도 모자라 민간인의 집에 불을 질렀고 소, 돼지, 닭을 잡아가 함상에서 승전 축하 잔치를 벌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전몰 장정들에게 급료와 위문금을 내려주고 장사를 지내게 했다. 추모 사당을 짓고 희생된 장정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위령제도 지냈다. 일본과 강제합병되면서 폐지됐던 위령제는 2005년부터 다시 명맥을 잇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일본이 인천의 역사를 기록한 인천부사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운양호 사건은 역사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다. 전사한 장병들의 후손들을 만날 수가 없다. 당시 방어사령관이었던 이민덕 첨사는 진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곤장 백대를 맞고 풀려났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후손들은 치욕적인 일로 생각해 없었던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영종도 고지도
추모비 건립, 역사복원의 첫 출발
역사 속에 묻혀있던 ‘영종진 피격사건’이 다시 현재로 걸어 나오고 있다. 2005년 9월부터 시작된 위령제가 단초가 됐다. 이 위령제를 계기로 사람들은 당시의 아픈 역사에 관심을 갖고 행사를 벌이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위령제는 운양호 사건과 영종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지난 4월에는 영종진공원 내에 있는 구읍배터에 35명의 전몰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역사복원의 출발을 알렸다. 하늘 높이 치솟은 추모비가 영령들을 넋을 위엄 있게 기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태평루가 건립되고 있다. 태령루도 운양호 사건 때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누각이다. 영종도는 고려 때 예성강의 벽란도와 송나라 명주를 연결하는 교통요지였다. ‘경원정’이라는 객관(客館)이 있어 이곳을 지나는 중국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경원은 고려시대 인천의 지명이다. 태평루에서는 인천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서해바다의 거대한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월미도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태평루라는 이름은 세상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했던 옛 위정자가 지었을 것이다.
영종도 역사를 사랑하는 주민들은 이곳에 동헌과 추모사당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추금희(94) 어르신은 “영종진 복원과 더불어 추모사당을 세워 자라나는 후세들의 호국정신 함양과 역사교육의 산실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종진공원에 세워진 추모비
2016년 하반기, 제비를 닮은 영종역사관 완공
2016년 하반기에는 영종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종역사관이 완공된다. 역사관은 영종의 역사성을 고려해 제비의 이미지를 디자인으로 차용했다. 전시장은 자연·지리, 선사, 고대, 고려, 조선, 영종진 방어전투, 근대 이후 영종과 국제도시로의 변천과정으로 나눠 보여준다.
영종 일대 지명 유래, 영종의 선사문화인 빗살무늬 토기, 고인돌, 청동기시대 주요 유적과 유물, 영종의 고대문화를 보여주는 낙랑토기, 원삼국시대 수혈주거지와 패총, 중산동에서 발굴한 삼국시대 주거지 등이 유물과 모형으로 복원되어 전시된다. 또 고려시대 중국과의 교류거점을 보여 주는 경원정과 태평암, 운양호 사건과 영종진 전투, 신공항 건설에 따른 영종의 변화 등이 주요 전시물로 꾸며진다. 유물 이외에도 발굴 모형, 디오라마, 고지도 등을 배치하여 흥미롭고 재미있는 전시장으로 만들게 된다.
야외전시관에는 운남동 고인돌, 용유동 선정비군, 연자매, 문인석 등이 이전되어 전시될 예정이다.
영종역사관이 완공되면 영종진의 역사 복원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고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 될 듯하다.
영종진은
영종도 포구에 영종진이 있었다. 효종4년(1653년)에 설치되었고 현종4년(1668년)에 방어영으로 승격했다. 고종 12년(1875) 9월 일본 군함 운양호가 포격을 가해 진의 일부가 파괴될 때까지 약 200여 년 간 군사적으로 큰 몫을 담당했던 곳이다.
진(鎭)과 보(堡)는 조선시대의 주둔군대로, 진은 지금의 대대(大隊), 보는 중대(中隊) 규모다. 서로 상하관계는 아니고 주둔 병력의 수만 다르며, 각각 그 밑에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세운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砲)와 총구멍을 설치해 두었던 군사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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