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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가운데, 여전히 따듯한 아버지의 바다
겨울 한가운데,
여전히 따듯한 아버지의 바다
겨울 바다 앞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짙푸른 바다 빛이 눈에 닿기만 해도 시리다. 하지만 섬의 겨울은 따듯하다. 차디찬 도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포근함이 섬과 바다 공기 사이를 맴돈다. 선녀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섬. 선재도(仙才島) 바닷가에는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눈먼 어부였던 아버지를 그리는 한 남자가 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바다, 그 넓고 깊은 품에 안기다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다.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덧 십이월,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문득 겨울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언제나 한결같은 널따란 품 안에서 먹먹한 가슴 달래며 위로받고 싶다.
영흥도와 대부도 사이, 다리로 이어진 섬 아닌 섬 선재도는 어느 날이고 훌쩍 떠나기 좋다. 섬은 선녀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경치가 수려하다.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섬 33선’ 가운데 최고로 선정하면서 비밀스러운 섬을 세상도 알아버렸다. 섬은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가로지를 수 있을 만큼 아담하지만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해안을 따라 곳곳에 비경이 숨어있다. 섬으로 가는 길, 선재대교를 건너면 바로 왼편 당산나무 고개 너머로 작은 동네가 나온다. 당너머 마을이다.
이 마을 바닷가는 여느 따뜻한 나라의 해변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모래 결이 보드랍고 물빛이 맑다. 모래사장 한편에 바람결 따라 일렁이는 자메이카 국기도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바다 건너에는 목섬이라는 무인도가 있다. 동그란 바가지를 물 위에 봉긋 올려놓은 듯 앙증맞은 이 섬은 하루 두 번 금빛 융단을 깔고 제 품을 연다.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는 운명의 끈으로 묶이듯 4대 째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사진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끈끈한 연결 고리였다. 사진 자우
지금은 아버지를 따라 저세상에 있는 ‘바다’는 맹인 안내견으로 사랑 받는 골든리트리버의 혼혈이었다. 운명 같았다. 사진 자우
섬과 눈먼 아버지를 사진에 담다, 그리고 사랑하다
자우(慈雨). 본디 이름은 김연용. 그는 선재도를 찍는 마흔 살의 사진작가다. 그의 이름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자신의 사진이 세상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길, 그는 소망한다.
그는 눈먼 어부였던 아버지를 3년간 따라다니며 모습을 뷰 파인더에 담았다. 그리고 2003년 포토에세이 ‘아버지의 바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목수이자 대장장이, 뻥튀기 장수, 운전사였던 아버지는 지병으로 시력을 잃고 어부가 되었다. 섬에서 나고 살았지만 생전 갯일을 할 줄 모르던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지팡이 끝 쇠갈고리 하나에 몸을 맡기고 검은 바다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 오로지 햇살과 바람의 감촉에 의지해 우럭, 농어, 망둥이를 낚아냈다. 눈먼 아버지에게 바다는 삶의 전부가 되었다.
자우가 처음 카메라를 손에 든 건, 아버지의 자취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서였다.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와 섬을 담는 작업에 매혹되었다.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어부의 삶을 살기에 이르렀다.
눈먼 아버지가 바라보던 유일한 세상인 선재도 앞바다를 아들은 '아버지의 바다'라고 부른다.
삶의 향기로 채워진 ‘바다 향기’
“아버지 고생 좀 그만 시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때로 험한 날씨 때문에 바다에 나갈 수 없을 때면, 아버지는 몹시도 견디기 힘들어하셨습니다. 바다에 나간 아버지를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우는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의 눈이 되어 드리기 위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다. ‘바다향기’.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들이 머물던 보금자리이자 삶의 터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투박하고 촌스러운 횟집에서 세련된 감성의 레스토랑으로 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복슬강아지 ‘보람’이가 반갑게 맞이하는 바다향기는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상의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곳이 ‘치유의 공간’이 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가게 곁 작은 텃밭에는 초록빛 허브와 채소가 싱그럽게 자란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들이 담은 아버지의 기록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가슴이 저릿해진다. 그가 먼 나라에서 가져온 여행의 기억들도 시선을 붙잡는다. 마치 작은 갤러리 같다. 카페 밖에는 바다를 향해 품을 활짝 연 노천 테이블과 작은 바가 해변의 낭만을 더욱 무르익게 한다. 그 안에서 잠시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인다. 끝없는 하늘, 그 아래 펼쳐진 바다 그리고 바다, 그 사이 신비롭게 떠 있는 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재도 바닷가를 이제 어린 아들이 뛰어놀고 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 아들과 지킬 ‘아버지의 바다’
“아버지가 하늘로 가시고 선재도에 머물 이유를 찾기 힘들었어요. 내가 꿈꾸는 세상이 있겠다 싶어, 멀리 여행도 떠나보았지요. 하지만 지구 반대편 사람들도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고향 땅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바라보던 유일한 세상인 선재도 앞바다를 그는 ‘아버지의 바다’라고 부른다. 7년 전, 그 바다에 기적처럼, 선재도에서 5대째 살아갈 아이가 태어났다. ‘바’닷가로 내려온 ‘하’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내아이 ‘바하’.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를 이제 아내와 아들딸이 채우고 있다. 가족은 그가 여전히 섬을 지키는 유일한 이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한 남자의 ‘아버지의 바다’를 뒤로하고, 잊고 있던 나의 소중한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 것’,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전한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을 붙잡는다.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포근함이 공기 중에 맴도는 듯하다. 선재도 그 섬의 겨울은 따듯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바다는 여전히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가족과 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찾아가는 길 선재도는 시흥 시화방조제를 건너 안산 대부도를 지나 다시 선재대교를 건너 다다른다. 다리를 지난 후 길 건너편 100미터 전방으로 바다향기 간판이 보인다. 대중교통은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709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주소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 148-2
문의 바다향기 www.bdhg.co.kr, 889-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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