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지난호 보기

신식 풍물 오르내리던 경인가도

2015-12-03 2015년 12월호



신식 풍물 오르내리던 경인가도

살짝 발만 들어도 풍경은 달리 보인다. 까치발을 하면 보이지 않던 부분이나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평지에서 바라보던 거리와 동네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위성은 너무 멀고 헬리캠(helicam)이나 드론(drone)은 너무 비싸다. 그래서 올라갔다. 건물 옥상이나 교회 종탑에 올라 인천을 굽어보았다. 그 정도 높이임에도 인천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이번 호에서는 경동 예지요양원(구 상업은행) 옥상에서 경동 사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글·사진 유동현 본지 편집장


① 답동성당  ② 조흥은행 터  ③ 양복점 거리  ④ 동서대약국  ⑤ 애관극장  ⑥ 신신예식장





까치발을 든 지점 | 경동 예지요양원(구 상업은행) (중구 개항로 82)
일제강점기에 중구 해안동, 항동 등에 있던 은행들은 광복 후 새로운 중심지 경동으로 옮겨 왔다. 사람 쫓아, 돈 따라 이전했다. 항동에 있던 상업은행은 1956년 12월 20일 인천의 최고 상권이었던 기독병원 입구에 건물을 새로 짓고 이전했다. 지역이 쇠퇴하자 은행은 다시 그곳을 떠났고 고풍스러웠던 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7층짜리 요양병원(경동빌딩)이 들어섰다.


경동(京洞)은 ‘경성(서울) 가는 길목에 있던 동네’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경동파출소부터 배다리 앞 대진침대(옛 서울은행)까지의 길을 흔히
싸리재(丑峴·축현) 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옛날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우마차의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1913년과 17년 두 차례 언덕을 깎아내면서
현재 모습이 되었다. 경인철도가 운행되기 전 제물포항에 내린 이방인들은 경성을 가려면
마부를 앞세우고 이 길로 들어서야 했다. 흔히 이 길을 ‘경인가도’라고 불렀다.
그들 봇짐에 함께 실려 온 온갖 개화 양품이 이 길가에서 거래되면서 
개항 이후 1990년대 초까지 최신 유행을 이끌어가던 인천 최대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수차례 외관이 바뀐 끝에 1937년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답동성당. 중국에서 넘어 온 석공들이 돌을 깎아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1980년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① 답동성당 : 파리 외방선교회는 1889년 7월 1일 인천 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현 답동성당)을 세운다. 답동성당은 1896년에 지은 옛 성당을 그대로 두고 외곽을 정면에 3개의 종탑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확장 개축해 1937년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6·25전쟁 때 일부 훼손되었지만 수많은 함포 사격에도 끄떡없이 버텨냈다. 1980년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고 1981년 국가 지정 사적지 제287호로 지정됐다. 큰길가 쪽 가톨릭회관이 생기기 전에는 멀리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었다. 몇년 전 답동성당 성역화사업(역사공원 조성사업)과 관련해 회관의 철거가 거론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져 터만 남은 조흥은행 인천지점

② 조흥은행 터 : 현재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에는 개항기 때 인천우체사가 있었다. 우체사가 이전한 이후 김휘관 양조장이 들어서 소성소주를 생산했다. 1958년 중구 중앙동 58은행 자리에 둥지를 튼 조흥은행 인천지점은 이 터로 이전해 건물을 새로 짓고 업무를 시작했다. 은행이 합병되고 상권이 침체되자 건물은 헐리고 주차장이 되었다.



한창때는 영화를 보기 전에 양복점 광고 몇 개를 봐야 할 정도로 경동에는 많은 양복점이 있었다.

③ 양복점 거리 : 번성했던 시절 경동거리에는 양복점이 줄지어 있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했다. 이 즈음 인천 극장의 영화 예고편 앞에는 양복점 광고를 몇 개씩 붙었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이제는 힘들어졌다.



광복 이듬해 1946년에 문을 연 동서대약국의 초창기 모습. 현재 약국 간판에도 새겨져 있다.

④ 동서대약국 : 기독병원 주변은 한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크고 작은 십 수 개의 개인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나 봉지째로 사 가곤 했다. 그중 대표적인 약국이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 모습의 사진이 새겨진 간판을 단 동서대약국이었다. 이 약국은 70년 동안 한자리에서 약을 팔았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가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한창 전성기 때의 신신예식장 야외 촬영장. 6,70년대에는 이 예식장 일정에 따라 결혼 날짜를 잡기도 했다.(심현빈 씨 사진 제공)


⑤ 신신예식장 : 애관극장 뒤 언덕에는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신신예식장이 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르려면 비어 있는 날에 맞춰 결혼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곳이었다. ‘신신컨벤션웨딩홀’로 바꾸면서 신세대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쓸려가는 세월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 3년 전 모 대학교에서 이 건물을 노인요양원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우아했던 건물은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해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단체사진을 찍었던 정원의 흔적과 신랑신부가 새 출발을 위해 첫발을 내디뎠던 경동 쪽으로 난 옛 계단 출입문은 그대로다.



1960년 재건축한 애관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갖고 있었다.

⑥ 애관극장 : 인천에 와서 돈을 많이 번 부산 출신 정치국은 1895년 창고를 개조해 ‘협률사(協律社)’라는 극장을 꾸몄다. 이 극장은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섰다. 이 극장이 후에 축항사(築港舍)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15년 무렵 다시 애관(愛館)으로 개명되었다.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한 애관극장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가진 영화관이었다. 애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 인사를 하던 날 경동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여전히 영사기를 힘겹게 돌리며 5개관을 운영하고 있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아이디나 소셜 계정을 이용하여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계정선택
인천시 로그인
0/250

전체 댓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