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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이 이 땅에 뿌리내린 ‘모노즈쿠리’
노장이 이 땅에 뿌리내린 ‘모노즈쿠리’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남동국가산업단지 내에 있는 한국닛켄. 와카이 슈지(76) 사장이 돋보기안경 너머 예리한 눈빛으로 기계 설계도를 살피고 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이지만 노장은 지금도 가장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의 불을 밝힌다. 나이를 잊은 열정은 일본의 장인정신 ‘모노즈쿠리’에서 기인한다.
“한국의 고려청자를 좋아해요. 불량률 제로. 저는 물건을 만드는 데 있어 한 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아요. 하지만 도예가는 오랜 시간 흙을 빚어도 불의 심판 끝에 불과 30%만 성공을 거두지요. 제조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를 빚는 장인의 심정이 헤아려진다고나 할까요.”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 혼신의 힘을 다해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든다.’ 그렇게 흘린 땀방울은 오늘날 국내 최고 기술을 보유한 공작기계 제조업체 한국닛켄을 있게 했다.
와카이 슈지 사장은 1962년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쇠를 만졌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한길을 걸어왔다. 전해져 내려오는 가업이 있었지만 기계를 만드는 일이 더 즐거웠다. 그런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건 40여 년 전이다. “1974년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기술자를 육성하는 마음으로 세세하게 기계 다루는 법을 알려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구심이 강하고 힘이 넘쳤어요. 같이 기계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돕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끌렸고요.”
젊은 시절 그는 공작기계를 팔고 기술을 전하는 영업사원으로 10여 년 넘게 해외를 다녔다. 호주, 유럽 안 가본 나라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한국이었다. 그리하여 1987년 동구 만석동에 뿌리내리기 이르렀다. 그는 만석동이 아니었다면 인천에 정착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당시 만석동 일대는 참 살기 어려운 동네였어요. 거대한 쪽방촌이 있었고 주민들은 동일방직과 대우중공업 같은 공장에 다니며 돈벌이를 했지요.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 남동국가산업단지가 막 조성됐지만 만석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번 돈은 재투자해 한국에서 쓰겠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그가 닛켄 한국 지사로 발령받으면서 처음 꺼낸 말은 ‘내 회사로 키우겠습니다’였다. 일본의 하청업체가 아닌 독립된 기업으로 한국 시장에서 역할을 하고 싶었다. 내년이면 한국닛켄 창립 30주년이 된다. 그동안 회사가 잘 되면 직원들에게 돌려준다는 생각으로 사심 없이 일해왔다. 지난 2007년 남동국가산업단지로 사옥을 옮겼지만, 그가 ‘식구’라고 말하는 86명의 직원 대부분이 여전히 만석동에서 이 회사로 출퇴근을 한다.
한국닛켄 입구에는 ‘인천광역시’가 새겨진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벌써 13년 째다. 최근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에 ‘인천 시기 달기’ 인천사랑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만큼 인천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인천은 미래가 있는 도시예요. 바다를 품고 있다는 건, 바로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처음 인천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처럼 큰 변화가 있었어요. 바다 위로 인천대교가 놓이고 국제공항이 생기면서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지요. 인천의 앞날이 기대됩니다.”
고국이 그립지는 않느냐고 물으니, 그는 인천이 아닌 다른 도시는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01년 한국인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내면서는 그를 위로하는 한국인의 정에 감동했다. ‘아, 내가 인천사람이구나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본 사정에 아주 어두운 사람이예요. 내 있을 곳은 바로 여기 인천입니다.” 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이 땅에 뿌리내리겠다는, 이 남자의 말이 왠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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