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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익동 해안가에 세운 해외 선교 방송국
학익동 해안가에 세운 해외 선교 방송국
1956년에 세워진 학익동 극동방송은 마치 ‘외국인촌’ 같았다. 당시로선 상당히 외진 곳이었던 학익동에 꽤많은 외국인이
모여 살았다. 인천뿐 아니라 국내 어디에서도 외국인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곳에 한국 사람들이
방송하러 오면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들은 인천을 기반으로 중국, 북한, 소련, 몽골 등의 공산권 국가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세운 라디오방송국 HLKX(한국복음주의방송국, 극동방송 전신)에서 일하고자 모인 선교사들이었다.
글 이용남 본지편집위원 사진 극동방송 제공
초창기 학익동 극동방송 시절 모습. 이곳에 선교사와 엔지니어들을 위한 사택과 송신소가 보인다.
염분이 있는 바닷가에 안테나 세우면 강력 전파 송출
인천 학익동 588번지에 세워진 HLKX(한국복음주의방송국)는 1956년 12월 23일 중국, 소련 등 북방지역에 처음으로 복음방송 전파를 쐈다. 해외방송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이었다. 이 방송국을 세운 사람들은 미국 팀(TEAM)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고 이 중 톰 왓슨(Tom Watson) 선교사가 주도했다.
톰 왓슨은 원래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상업방송을 하고 있던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1950년 한인 유학생 강태국으로부터 “왜 당신은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고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한다. 그는 1952년 한국에 들어와 한국복음주의방송국을 준비했다.
왓슨이 서울이 아닌 인천에 방송국을 설립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이나 소련까지 방송이 가려면 강력한 전파가 필요했다. 안테나가 염분이 있는 바다 근처에 있으면 전파를 네 배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의 갯벌을 빌려 안테나를 세우고 갯벌에 선을 연결했다. 또 다른 이유는 인천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미국에서 서울보다 유명한 도시였다. 이 유명세는 당시 방송국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방송국 건립을 위해 초창기 인천에 온 선교사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송국을 건립하는 도중 풍토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극동방송 초기 영어 방송을 책임졌던 캐럴 호블랜드(Carrol Hovland) 선교사는 파송될 때 한국을 전쟁이 막 끝난 위험한 곳, 미개한 곳으로 알았다. 사지(死地)로 떠나는 심정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송신소 건물과 사택은 왓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손수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비비며 건립했다. 자재와 노동력은 인천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공병부대의 도움을 받았다. 선교사들은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송신소 건물과 사택 아홉 동을 지었고, 인천 사람들도 방송국 건립에 힘을 보탰다. 11,12대 시장을 역임한 김정렬 시장은 선교사들에게 학익동 앞의 간석지를 안테나 설립 부지로 무료로 사용하도록 허가해줬다.
선교사들의 사택은 5, 60년대 미국 가정집의 양식을 그대로 본떴다. 초록색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아담한 단층 양옥으로 정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내부는 다락방과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전형적인 서양 가정집의 구조였다.
학익동 극동방송 시절 선교사들
방송국 앞 갯벌에 송신소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당시 송신소 안테나 맨 꼭대기에 은덩이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동네 아이들, 갯벌 안테나 밑동 잘라다 엿 바꿔 먹기도
당시 학익동의 교통 사정은 매우 안 좋았다. 외국 선교사와 엔지니어들은 사택이 있어 괜찮았지만 교통 때문에 내국인들은 방송국에서 일하기를 꺼렸다. 방송국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에 자갈을 깐 도로였고 대중교통은 수인선 협궤열차가 유일했다. 수인선 역 가운데 송도역이 방송사에서 가장 가까운 편이었으나, 열차가 자주 다니지 않았고 너무 멀어 걷는 것도 힘들었다. 선교사나 방송기술자들은 자갈길에 뽀얗게 먼지를 뿌리며 달리는 특이하게 생긴 흰색 방송국 차를 타고 다녔고 직원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방송국 앞 갯벌에 세워진 안테나는 사람들의 궁금증의 대상이었고 이야깃 거리를 만들어 냈다. 갯벌에는 까마득하게 높은 송신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높이가 무려 133m나 되는 철탑 맨 위에는 전기가 잘 통하는 은괴가 있었는데, 이 은덩이를 이용해 공산권인 소련까지 전파를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의 관심은 소련까지의 전파 발사가 아니라 은괴가 가진 현실적 가치였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밤중에 은괴를 노리고 기어오르다가 중간에 경비원에게 발각되었다느니, 거의 다 올라갔다 감전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은덩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선반 위의 떡’은 손대지 못했지만, 갯벌에 묻힌 안테나 밑 동선을 동네 아이들이 잘라다 엿과 바꿔 먹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 전파 송출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방송국 앞 바닷가, 미군 유류장에서 주안 쪽으로 가는 송유관을 몰래 뚫어 휘발유를 절도해가는 사건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어떤 날은 미군 경비병의 날카로운 위협 총성이 하늘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극동방송 사택의 과거와 현재
근대 역사의 숨결 담긴 송신소 건물과 선교사 사택
1958년 12월 5일에 방송국에 부임했던 여 선교사 미스 레스번(Pear Rathbun)은 인천의 첫 인상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비행기에서 한국 땅을 내려다볼 때 나무가 없어서 이상하게 느껴졌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공항에서 학익동의 방송사까지 랜드로버를 타고 갔는데 길이 무척 험해서 마치 말을 탄 것같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한국은 참 가난해서 거지와 도둑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옷과 먹을 것을 주변의 주민들에게 자주 나눠 주었습니다.”
또 레스번은 “먹을거리는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을 통해 구하거나 시장에 나가 직접 사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통조림을 가져다 보태기도 했고 빵은 직접 만들었습니다. 취사도구는 작은 곤로가 유일했습니다.”
미스 펄 레스번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1996년까지 38년 동안 한국에 남아 영어 선교 방송을 담당한 최장기 선교사였다.
1959년 4월 한국에 들어온 후 방송국의 어린이 성경교실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존 쿡 목사는 선교사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그들의 본국인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음식은 서양인들의 식성에 맞지 않았지만 차츰 한국 본토 음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을 때는 고무신을 즐겨 신었습니다.”
또 “선교사들과 인천 시민들은 서로 배려하며 잘 지냈고, 어린 소년들이 ‘헬로우’를 외치며 자주 쫓아다녔는데 나는 그들이 영어를 연습하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극동방송은 내년이면 방송 60돌을 맞는다. 이 송신소 건물과 사택은 한국과 공산권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선교사들의 노고가 배어 있다. 지금은 동양화학의 소유로 되어있다. 한때 동양화학 측에서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식당을 지으려고 했는데 워낙 튼튼하게 잘 건축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택은 지금 사용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당시 선교사들이 건물을 얼마나 견고하게 짓고 성실하게 일했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동양화학은 이 건물들을 헐고 임대주택을 지을 계획이다. 기독교 복음 전파가 시작되고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방송을 송출한 곳의 역사적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학익동 방송국 시절 여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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