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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고 그리워하며,인천을 쓰다
살며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인천을 쓰다
지난해 겨울, 인천을 배경으로 한 테마 소설집 <인천, 소설을 낳다>가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났다. 김진초, 이목연, 양진채, 구자인혜, 신미송, 정이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인천 여성 작가들의 손끝에 스민 인천의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기나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섬을 품은 인천은 문학적으로 깊은 영감을 주는 도시다. 작가라면, 문학을 사랑하듯 인천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겨울과 봄 사이 2월의 어느 날, 수도국산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미추홀구락부에서 인천의 여성 작가 6인을 만났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소주 한 병’ 비운 다음 날
인천 여성 작가들의 모임 ‘소주 한 병’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테마 소설집 <인천, 소설을 낳다>를 낸 지 석 달이 지났다. 이 책은 지난해 인천이 세계 책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지원을 받아 발간됐다. 작품에는 인천의 부둣가, 부평동 다다구미, 신포동, 송도국제도시, 효성동 2번 종점, 십정동 여우재길 등 익숙한 삶의 공간이 등장한다. 이 소설이 불러일으킨 변화가 궁금했다.
양진채 책을 내고 난 후, 전국의 극장을 연구하는 분에게서 작가들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소설 속 공간이 자신이 과거에 살던 집과 비슷하다며, 인천에 다시 와보고 싶다고 한 독자도 있었고요. 작가로서 개인적으로 전엔 인천이라는 도시를 포괄적으로 봤다면 지금은 골목골목 소소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인천에 더 깊숙이 다가서고 소설과 가까워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김진초 전에는 작품의 배경이 인천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어요.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인천에 살고 있으니 이왕 드러내고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과연 이 의도가 성공적이었을까 싶었어요. 전국 소설가 협회 모임에서 만난 제주도 소설가 한 분은 이 책을 보고 굉장히 부러워하셨어요. 전라남도 곡성에 사는 한 소설가도 책을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고요. 전국 각지에서 다들 궁금해하세요.
양진채 부산은 지역 작가들이 부산의 지명을 소재로 에세이를 써서 책을 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소설로 묶은 적은 없지요. 우리 책을 보고 그네들도 지역을 테마로 한 소설집을 낼 생각을 했다고 해요. 서울은 이미 2, 3년 전에 서울을 배경으로 소설집을 냈고요. 도시마다 이런 책이 하나씩 있으면 그 지역의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 생각해요. 작가 역시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작품에 파고들수록 지역 작가로서 인식이 높아질 테고요. 춘천 하면 이외수가 떠오르듯 말이죠.
정이수 인천 작가로서 지역을 담아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내 작품은 제목부터 효성동 ‘2번 종점’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들어가요.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살거나 살았던 분들께서 큰 관심을 갖고 작품을 읽어 주셨어요. 재미있게 봤다는 전화도 종종 오는데, 보람을 느끼면서도 더 잘 써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다음 작품은 더 열심히 준비해서 완성도를 높이고 싶어요. 아, 최근 인천시에서 낸 <섬, 숨이 되다>라는 책을 보면서 인천 섬에 대해 쓰고 싶다는 욕심이 났어요.
신미송 독자들은 자신에게 ‘필’이 오는 작품이 있으면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에요. 나는 송도국제도시 한가운데 있는 스트리트 서킷을 테마로 글을 썼어요.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은 젊은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작품으로 다양한 독자층과 소통한다는 건 작가로서 즐거운 일이에요.
양진채 <검은 설탕의 시간>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소설 <검은 설탕의 시간>은 작가의 유년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유일한 소설이다. 부두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복원해내는 과정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다. 작가는 인천을 그리움의 도시라고 말한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김진초 <너의 중력> <여우재로 1번 길>
1997년 <한국소설>에 <아스팔트 신기루>가 당선되며 등단. 2006년 ‘인천문학상’을 수상, <학산문학> 편집장을 지냈다. 작가는 세기가 바뀔 무렵 신포동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기억을 더듬어 <너의 중력>을 집필했다. <여우재로 1번 길>은 택시 기사들이 호젓한 여우고개에서 소변 보는 모습에 착안, 도살장의 이미지와 엮어 몽환적으로 표현했다.
‘인천, 소설을 낳다’
인천은 개항의 근대사와 질곡의 역사가 흐르고, 바다와 섬, 공항을 품고 있어 문학적으로 영감을 주기 충분하다. 하지만 요 근래 인천을 다룬 소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천의 진짜 이야기. 인천 여성 작가 6인이 말하는 인천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목연 현재를 살면서 잊힌 역사의 기억을 찾는 일은 참으로 매력적이에요. 전쟁 후에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에스캄 시티(Ascom City)라고 불렸던 부평에서 한국 대중음악이 꽃피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아직 잘 몰라요. 그 자료를 조사하다 부평 다다구미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어요.
구자인혜 역사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그 시대의 정신은 살아남기 마련이에요. 인천에서 역사적인 장소를 꼽자면 강화도를 빼놓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번 소설집을 통해, 강화 고려산의 한 산사를 배경으로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떠올려 보았어요.
김진초 서울 근교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80년대에 인천으로 왔어요. 산골 촌년이라 그런지 확 트인 바다 가까이에서 사는 게 좋았어요. 고향이 가끔 그립기는 해도, 인천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인천에서 태어난 양진채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양진채 사실 살면서 인천은 참 별 볼일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도시예요. 어릴 때 이모가 부두에서 굴을 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옆에서 굴 껍데기 무덤을 타고 오르며 놀곤 했지요. 인천에 대한 잠재된 기억의 10%도 소설에 못 풀어냈어요. 인천이 바다와 섬으로만 이야기되는 건 아니에요. 책을 낸 뒤에 인천의 어느 곳이든 작품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신미송 20여 년 전에 결혼하면서 당시 막 개발을 시작한 남동구 만수동으로 이사왔어요. 흙먼지 날리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황량한 도시에 애정이 있을 리 없었어요.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준 것이 문학이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디찬 바람 불던 낯선 도시가 있었기에,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요.
구자인혜 저도 30여 년 전에 결혼해서 계양구 병방동으로 왔는데 정말 삭막했어요. 아까 바람 이야기를 하셨는데, 전신주 사이에서 바람이 웽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이 이렇게 황량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 줄곧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어요. 그때 바람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인천에 큰 빚을 지고 있네요.
정이수 인천은 구석구석 품은 것이 참 많아요. 글을 쓰면서 늘 소재에 목말라했어요. 그때 누군가 조언해 주었지요. 인천은 산, 들, 바다, 여기에 섬까지 품고 있으니 작품의 소재가 얼마나 무궁구진하냐고요. 글쟁이들에게 자연이 주는 혜택은 무시 못 할 것이에요.
정이수 <2번 종점>
2002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닥치는 대로 읽고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다 여기까지 왔다. 결혼 초 변두리 18평 아파트에서 생활한 경험을 토대로 서민의 애환을 심도 있게 다루고 싶었다. <2번 종점>에는 효성동 끝자락에 사는 토박이와 뜨내기들이 어우러져 엮어 내는 질펀한 삶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목연 <거기, 다다구미> <그물에 들다>
2003년 김유정소설문학상, 2009년 인천문학상을 받았다. 작가는 어떤 사건을 접하며 작품의 착상을 얻는다.
<거기, 다다구미>는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의 보급부대 에스캄을 조사하면서 시작했고, <그물에 들다>는 자월도를 방문하고 나서 썼다. 인천은 파면 팔수록 이야깃거리가 드러나는 광맥이다.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떠도는 작가의 마음과도 닮았다.
아직 써야 할 것이 많다
소설가 윤후명은 추천사를 통해 “이들의 작품은 인천에 사는 그녀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인천이란 곳에 어떻게 아직도 내 꿈이 살아있는지 알려 준다”고 말했다. 인천 테마 소설집 <인천, 소설을 낳다>로 오늘의 인천을 담은 여성 작가들. 내일은 또 어떤 인천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써내려 갈지 궁금하다.
양진채 개항기 인천을 배경으로 영화 변사였던 주인공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을 곧 출간할 예정이에요. 더 열심히 소설을 쓰고, 인천 곳곳을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이목연 강화에서 10여 년을 살았어요. 강화 땅에는 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가 흐르고 있어요. 강화도 깊숙이 있는 사찰, 초지진에 서 있는 총알 맞은 소나무 한 그루도 내겐 달리 다가와요. 언젠가 강화를 배경으로, 세상이 기억할 멋진 작품을 쓰고 싶어요.
신미송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어요. 인천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다 보니 인천을 더 세밀하게 바라보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소재들이 실타래 풀리듯 나왔지요. 쓰면 쓸수록 더 다양한 소재로 인천을 녹여내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정이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중국인의 거리’를 쓴 오정희 선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지역 작가로서 인천을 담은 훌륭한 작품 하나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욕심나요. 언젠가 한번 제대로 써보고 싶어요.
이목연 글을 쓰면서 문장 공부를 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필사한 소설이 오정희 선생이 쓴 ‘중국인의 거리’였어요. 정말 훌륭한 작품이지요. 아, 다음 ‘소주 한 병’ 식구들과 함께 할 작품은 인천 섬을 테마로 하면 어떨까요. 인천시에서 낸 <섬, 숨이 되다>에 나온 열다섯 섬 가운데 우리가 다녀온 섬이 무려 열 곳이에요. 섬에 참 많이도 다녔네요. 올해 ‘소주 한 병’ 식구들 목표는 <인천, 소설을 낳다> 2탄으로 인천 섬에 대한 소설을 함께 쓰는 겁니다.
김진초 함께 작품 활동을 할 문인 창작실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요. 인천에는 섬이 168개 있어요. 그중 가장 외딴섬에 창작실을 만들어 함께 작업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다를 낀 도시에 살면서도 정작 바닷바람에만 시달리는 인천 작가들에게 소중한 공간이 될 텐데요.
‘소주 한 병’은 인천의 여성 작가들로 이뤄진 ‘굴포문학회’의 소설 분과 회원들의 모임이다. 소중한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벌써 12년째. 재작년에는 결성 10년을 기념으로 아일랜드로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고향 이니스프리에 가서 소주 한잔 따라놓고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읊었다. 좌담을 하기 며칠 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고려인 마을에 가서 어르신께 술 한잔 대접하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 흘렸다. 밤새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시내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여행의 이유를 물으니 ‘소주 한 병’의 주모 김진초 작가가 환히 웃으며 말한다. “영감 따위 얻으러 다니는 건 아니에요. 단지 낯선 곳에 가고 싶어서. 그냥 떠나는 거예요.” 하지만 낯선 곳에서 보낸 그들의 시간이 다음 어떤 작품으로 꽃필지, 기대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구자인혜 <은합을 열다>
2000년 <한국수필>로 등단, 2008년 동서커피문학상을 받았다. <은합을 열다>는 강화 고려산 산사의 사리 발굴 과정을 통해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독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지 늘 생각한다. 2016년에는 인천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도, 불편하게도 하는 소설집을 내고 싶다.
신미송 <서킷이 열리면>
2002년 <한국수필>에 <비빔밥>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작가는 집필하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킷이 열리면>은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서킷 자동차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래적인 도시인 송도 역시 사람들이 어깨를 기대고 서로를 안아주는 공존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작가들이 이야기꽃을 피운 ‘미추홀구락부’
홍예문 윗길 미추홀구락부는 조각가 김길남 선생이 운영하는 카페다. 카페 창밖으로 수도국산을 비롯한 구도심 일대가 펼쳐진다. 대부분 인천항을 바라보는 자유공원 인근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풍경 이다. 미추홀구락부 817-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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