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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할 타자’ 인천이 만든다
‘3할 타자’ 인천이 만든다
“2주 뒤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스케줄을 한번 확인해야 하고요.” 전화기 너머로 돌아온
대답이 심드렁하다. 시간상 인터뷰가 힘들다는 이야기다. 프로야구가 시작되려면 두 달이나 남았는데,
아니, 시범경기도 아직 시작 전인데, 야구 방망이 업체의 대표는 무엇이 그리 바쁜 걸까?
글 김윤경 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간신히 취재일정을 잡았다. 밀가루처럼 고운 나무 가루가 폴폴 쉴 새 없이 날리는 곳, 야구 방망이 제조업체의 모습이다.
서구 가좌동에 위치한 제로본스포츠에서 만난 이곳 직원들은 마스크를 쓴 채 나무 가루 사이에서 섬세하게 나무를 깎고 다듬고 있었다.
제로본스포츠 구본선 대표는 “야구 선수들이 겨울에 미국과 일본,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날 때 사용할 야구 방망이를 만들기 위해 지난 가을부터 무척 바빴다”며, “2월 내내 선수들의 해외 또는 지방 캠프를 찾아다니며 새로 제작한 방망이의 상태가 어떤지 체크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그 때문에 야구 시즌 전까지는 스케줄을 내기가 어렵다”며 취재에 난색을 표했던 이유를 들려줬다.
1g, 1mm의 오차도 불허한다
타자에게 방망이는 무사가 휘두르는 섬세한 칼과 같다. 그 칼의 작은 변화에도 몸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밀한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프로 선수들은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정에 따라 자신의 체형과 스윙 스타일에 맞춰 방망이를 주문한다. 이러다 보니 선수들의 타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야구방망이는 변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겉으로 보면 똑같아 보이는 방망이도 길이와 둘레가 조금씩 다르다. 제로본스포츠의 구본선 대표는 “장인정신 하나로 버틴다”고 말한다. 방망이는 나무 깎는 방법에 따라 1천 여 가지 모델이 있다고 한다.
제로본스포츠는 정밀한 방망이 제작을 위해 모든 방망이를 컴퓨터로 설계한다. 원목이 방망이가 될 때까지 무게도 6차례나 잰다. 선수들이 무게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구 대표는 “야구 방망이의 생명은 선수들이 원하는 무게 1g, 굵기 1㎜를 어떻게 맞추느냐에 달렸다”며, “예민한 선수들은 미세한 무게 차이도 금방 알아채는데, LG 박용택 선수는 여러 개의 방망이를 한 번 휘둘러보고는 3g의 차이도 찾아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또 제작하는 모든 방망이는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관리한다. “방망이를 제작할 때 선수들마다 방망이 이력제로 관리합니다. 원목 수입일자, 종류, 등급, 무게, 상태는 물론, 선수들이 원하는 무게와 스타일 등을 모두 데이터로 저장해서 숫자로 기록해 놓으면 선수마다 어떤 방망이를 선호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방망이 제작 요청 시 현재 그 선수가 사용하고 있는 동일한 방망이를 언제든지 제공할 수 있거든요.”
원목 선별에서부터 타율이 달라진다
방망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목도 까다롭게 선별하고 관리한다. 방망이를 만들기 위한 원목은 단풍나무다. 구본선 대표는 “단풍나무 방망이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배리 본즈가 2001년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할 때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선수들도 단풍나무 방망이로 바꿨다”며, “하지만, 단풍나무 방망이는 부러질 때 날카롭게 잘리면서 날아가기 때문에 안전성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단풍나무 이전에 국내 선수들이 사용한 건 물푸레나무 방망이였다고 한다. 현재 단풍나무 원목은 전량 미국에서 수입한다.
타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추기 위해 방망이 한 자루를 만드는 데 원목 여러 개를 버리기도 한다. 같은 나무에서 깎은 같은 크기의 원목도 습기나 밀도에 따라 무게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40피트 컨테이너 가득 원목을 수입하면 A, B, C등급 모두 합쳐서 1천500개 정도의 방망이용 나무를 만들 수 있지만, 이 중 무게나 나무 상태에 따라 프로 선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500개 정도밖에 안 된다”며, “선수마다 선호하는 방망이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컨테이너로 가득 원목을 수입해도 선수 한 명이 사용할 방망이 10개도 제작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제작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더구나 나무는 습도에 민감해 고주파를 사용해 건조하기도 하고, 원목을 보관할 때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고.
2014 인천아시아경기 금메달 방망이
2003년 6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왕 새미 소사(시카고 컵스)가 탬파베이와의 경기 도중 코르크로 속을 채운 부정 방망이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면서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경기 중 부정 방망이 사용은 엄연히 불법.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월 한국야구위원회(KBO) 홈페이지를 통해 공인 방망이 신청을 접수받는다. 해당 제조사에 대한 서류 검토가 끝난 후 샘플 방망이를 제출받아 검사하는데, 이 과정까지 통과하면 공인 방망이로 인정한다.
그러나 공인 방망이라고 해도 경기 때마다 방망이 신경전은 상당하다. 지난 2014년 문학구장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대표팀 선수 15명 중 12명이 제로본스포츠의 방망이를 사용했다. 결국 대만에 6-3으로 역전승했다. 대만 측은 경기 시작 전 방망이 검사를 다시 요청하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대만 측의 검사 요청에 따라 저희 방망이가 더 알려진 셈이죠. 한국야구위원회가 인정한 공인 방망이 임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경기 전부터 신경전은 대단하다”며 구 대표는 경기장 밖의 치열한 분위기를 전한다.
이제 3월이면 야구팬들은 꽃샘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경기장을 찾을 것이다. 선수들이 휘두르는 야구 방망이 하나에도 많은 신경전과 제작업체의 깐깐한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면 경기가 더욱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400홈런 친 야구방망이
제로본스포츠는 2014시즌부터 이승엽 선수의 방망이를 제작하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통산 400홈런 기록도 여기서 만든 방망이로 세웠다. 이승엽 선수 외에도 박용택, 황재균, 김태균, 이재원, 민병헌, 정수빈, 박한이 등이 제로본스포츠의 방망이를 애용하고 있다.
이승엽 선수는 단풍나무로 제작한 880~890g의 야구 방망이를 사용한다. 방망이 손잡이와 맨 아랫부분인 노브도 선수들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제작하는데, 이승엽 선수는 노브를 손바닥으로 감싸기 때문에 경계선이 없도록 제작한다. 노브를 감싸 쥐면 방망이를 더 길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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