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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避하던 땅에 세운 교육 요람

2016-05-03 2016년 5월호

피避하던 땅에 세운 교육 요람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기념 사진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다섯 번째로 인천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인천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가 둥지를 튼 곳은 중구 도원동이다. 이곳은 한때 ‘인천의 끝’이었다. 많이 외진 곳이었다. ‘모모산’이라 불린 산 아래로 실개천이 흘렀다. 개천은 지금의 제2장로교회 앞을 휘돌아 독갑다리 밑으로 해서 바다로 흘렀다. 이 개천이 옛 인천의 지경(地境)이었다. 그 바깥은 부천군 문학면과 다주면이었다.
외진 곳에는 ‘멀리하고 싶은’ 님비시설이 들어서는 법. 지금의 중앙여상 자리에 콜레라, 장티푸스 등 전염병 환자를 격리해 치료하는 덕생원이 자리 잡았다. 덕생원의 전신은 ‘피할 피’ 자를 쓰는 ‘피(避)병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은 그곳을 멀리했다. 바람과 물만 그곳을 맴돌 뿐이었다. 
6·25 전쟁 중 이 덕생원은 일부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중앙여상이 들어섰다. 1952년 7월, 덕생원 낡은 목조 건물에 보합공민학교의 간판이 내걸렸다. 전쟁 통에 교실을 잃은 아동(3학급 240명)을 모아 가르쳤다. 이듬해 보합고등공민학교 주·야간 6학급의 인가를 받아 학생 70명으로 개교했다. 중등교육 시설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보합공민학교는 1964년까지 12회 598명을 졸업시켰다. 불우 소년들에게서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슬픔을 덜어 주었으며 교육을 통해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중등 과정인 보합고등공민학교는 1968년까지 13회 졸업생 1천765명을 배출했다. 정규 중학교를 가지 못한 남녀 청소년이 실의를 극복하고 희망적 삶을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얼마 후 공민학교는 문을 닫았고 1964년 중앙여자상업전수학교라는 새 간판을 달고 고등 상업기능 교육을 실시해 1976년까지 졸업생 1천60명을 배출했다. 이어 1967년 인천중앙여자중학교 배움의 터를 마련했으며 1974년 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두 외면하고 피했던 땅이 회계 실무교육의 요람으로 변했다. 중앙여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은 물론 우리나라의 사학 발전과 청소년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현재 중앙여상은 회계정보과, 금융회계과, 세무회계과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 교육을 바탕으로 재무, 원가, 관리, 세무 분야 등 회계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개교 이래 1만5천여 명에 이르는 졸업생은 공사, 대기업, 금융계 현장에서 회계 전문 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극동방송 스튜디오
한국복음주의방송국(극동방송)은 1956년 12월 23일 첫 전파를 쐈다. 해외방송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으로 인천에서 처음 라디오 전파를 쏜 것이다. 이 방송국은 1962년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에 991㎡(300평) 규모의 연주소(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당시 인천에서는 보기 드문 최신 서양식 건물이었기 때문에 자유공원 나들이객들의 좋은 구경거리였다. 1967년 12월 23일 극동방송은 서울 마포구 상수동 현 위치로 연주소를 이전했다. 사진은 보합고등공민학교 밴드부가 방송에 출연한 후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이 자리는 1882년 5월 22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장소로 최근 조사돼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공설운동장과 전도관
인천의 공설운동장은 웃터골(현 제물포고)에서 시작했다. 1934년 숭의동 벌판에 새로운 공설운동장이 들어섰다. 이 사진은 1950년대 공설운동장의 모습이다. 맨 바닥에서 학생들이 축구 시합을 하고 있다. 산기슭에 초가집들이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산꼭대기에 엄청나게 큰 건축물이 공사 중이다. 박태선 장로가 이끌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에서 짓는 ‘전도관’이다. 전도관은 1957년 10월에 완공했다. 아직 지붕이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봤을 때 1956년경으로 추정된다.     



객선부두와 오림포스호텔
인천의 옛 부두는 인천역 뒤편에 있었다. 1973년 인천연안부두가 개설되었고 이듬해 객선부두와 어선부두가 이전했다. 학생들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포즈를 취한 이곳은 현재 도크가 들어섰다. 뒤편으로 오림포스관광호텔이 보인다. 1965년 개업한 이 호텔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운영했다. 2000년 ‘카지노계의 대부’ 전낙원(田樂園)이 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파라다이스 호텔로 바꿨다. (71년 앨범)



인하대 캠퍼스 쌍발기
오랜만에 교정을 벗어나 대학 캠퍼스로 나들이 갔다. 인하대는 하와이 동포들의 도움으로 1954년 개교했다. ‘인하’라는 이름은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 앞 글자에서 따왔다. 대학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인하대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1968년 한진그룹은 인하학원의 운영을 맡았다. 항공회사답게 잔디밭에 퇴역한 쌍발기를 갖다 놓았다. 그곳은 인하대의 명소가 되었다.(74년 앨범)



염전 수차(水車)
염전에서 수차(水車)를 돌리는 염부들의 자료 사진 한 장이 졸업앨범에 삽입됐다.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에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조정에서 1정보(약 3천평)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지를 인천에 조성했다. 현재의 홈플러스 간석점 부근인 십정 1동 558-7 일원이다. 이후 약 99만1천735㎡(30여 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염전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인천은 한때 전국 소금 소비량의 절반을 충당할 정도로 풍부한 생산량을 자랑하기도 했다.(76년 앨범)



제일제당 견학
CJ그룹의 모태는 제일제당이다. ‘CJ’는 제일제당의 영어 이니셜이다. 1970년 수인역 부근 신흥동 8만㎡(2만4천여 평) 부지에 제일제당 공장이 준공됐다. 이 공장에서는 사탕수수 원료를 수입해 ‘백설표’ 설탕을 생산했다. 매일 설탕 찌는 단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다. 사진은 산업체 견학의 일환으로 제일제당을 방문한 학생들의 모습이다.(82년 앨범)



1. ‘미션스쿨’ 답게 중앙여상은 합창단의 활동이 활발했다. 어머니들로 구성된 합창단도 이에 못지않았다. 72년 6월 KBS-TV에 출연한 어머니합창단. 모두 한복을 입은 모습이 그 어느 단복보다 아름답다.(72년도)



2. “예쁜 건 다 화장발이란다”. 졸업과 동시에 직장인이 되는 여상 학생들에게 화장법은 필수 교육. 기초화장품을 바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녀에서 숙녀로 가는 것 같아 그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80년도)



3. 1983년 10월 9일 버마(미얀마)의 수도 랭군(양곤)의 아웅산 묘소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이 저지른 폭파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했다. 전국에서 이를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불같이 일어났다. 중앙여상 강당(83년도)



4.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가사실습. 국자, 솥, 냄비 등 주방도구가 격세지감이다. 요즘의 가사실습실에 전자레인지, 식기세척기 등이 설치되리라는 것을 이들은 상상이나 했을까.(75년도)


5. “나, 총 든 여자야”. 예전에 중앙여상에는 근대5종 선수들이 있었다. 유니폼이 아닌 교복을 입은 채 총을 든 양갈래로 딴 머리를 한 소녀들의 모습이 이채롭다.(77년도)


6. 여상에서 주산 실력은 취업의 ‘필살기’다. 정기적으로 교내에서는 주산대회를 연다. 계산을 끝내고 손을 번쩍 든 학생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80년도)


7. 유신과업은 어른들만 하는 게 아니었다. 여학생들도 이룩해야 할 ‘과업’이었다. 당시 모든 슬로건에는 ‘유신’이란 단어가 빠지질 않았다.(78년도)


8. 7,80년대 소풍에서 기타는 챙겨야 할 필수 품목이다. 그들은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부르고 낭송했을 것이다. 교복에 모자 쓴 센스. 모자 하나만으로도 소풍 패션은 완성되던 시절이다.(82년도)




미스 ‘미소 중앙’


중앙여상의 전통 중 하나는 ‘미소중앙’ 선발대회다. 80년대 시작한 이 행사는 개교기념일의 하이라이트였다. 각 학급을 대표한 미소여왕들을 대상으로 학년별로 진선미를 선발했다. 어느 해인가 심사위원으로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탤런트 홍요섭과 배종옥이 깜짝 초청되었다. 홍요섭은 학교 재단 관계자와 친인척인 인연으로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그들 덕분에 그해 대회에서는 모든 학생이 ‘미소중앙’으로 선발되었을 것이다. 선생님, 학생들 모두 헤벌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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