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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염전 사람들

2016-06-02 2016년 6월호


기다림 끝,

새하얀꽃을  피우기까지

세상 어디에도 인천 같은 도시는 없습니다. 세계의 하늘 아래 긴긴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땅, 가깝고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168개의 섬. 하지만 무엇보다 인천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안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당신입니다. 인천이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 구분 없이 하나 되는 ‘우리는 인천’.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하고 내일을 그려 봅니다. 그 여섯 번째로 긴긴 시간의 땀방울로 순백의 결정체를 빚어내는 시도 염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유월 햇살 담뿍 먹고 자란 소금꽃
시간이 멈춘 듯 온 세상이 고요하다. 눈앞엔 네모반듯한 소금밭이 수평선처럼 아득히 펼쳐져 있다. 신도, 시도, 모도 삼형제 섬이 손을 잡듯 다리로 이어진 북도면. 둘째 섬 시도에는 새하얀 보석을 품은 염전이 비밀스레 숨어 있다. 인천에는 이곳 시도와 백령도, 강화 석모도에서만 새하얗게 소금꽃이 핀다. 바닷물은 오랜 세월 햇볕을 받아들이고 비와 싸우고 바람을 다독인 후에야 비로소 새 숨을 얻는다. 외딴섬 안에 다른 세상인 듯 펼쳐진 소금밭, 잠시 숨을 고르고 발걸음을 느리게 움직여 본다.
어제는 비가 부어내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 위에서 초여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소금 만들기 참 좋은 날씨다. 유월의 염전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바쁘다. 한여름보다 햇살이 다사롭게 내리쪼이지만 바람이 살랑하게 불고 습기가 적어 소금을 긁어모으기 좋다. 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이 짠맛과 쓴맛은 덜고 단맛을 더해 소금의 풍미를 높인다.
때마침 소금 창고에선 염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천일염을 자루에 담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정성으로 빚어낸 육각형의 결정체를 음미해 본다. 달콤 짭조름한 바다 향이 입안에 파문처럼 번진다.





날카로운 뙤약볕보다 두려운 ‘비몰이’
강성식(75) 할아버지는 16년 전 충남 태안에서 평택을 거쳐 시도로 왔다. 그는 내리쬐는 태양을 벗 삼아 평생 소금을 긁어모으며 살아왔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노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검게 그을린 탄탄한 두 팔로 연이어 삽질을 하며 20킬로그램짜리 자루에 소금을 척척 담아낸다. 내일 강화도로 보낼 소금이라고 했다. 건장한 청년도 금세 지칠 법한데, 힘든 기색은커녕 일하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 비가 안 왔으면, 지금쯤 밭에 소금이 수북이 쌓였을 텐데…. 그랬다면 정신없이 바빴을 거야.”





윤정범(위) 씨와 강성식(아래) 씨.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고,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기면 그만이다. 소금밭을 일구는 삶이 행복하다.



시도 염전에는 강성식 할아버지와 함께 태안에서 온 매제 김순안(57) 씨, 윤정범(65) 씨, 나병만(51) 씨, 끝내 이름 밝히길 고사하는 한 명까지 모두 다섯 일꾼이 일하고 있다. 어제는 이들이 매우 바쁘게 움직인 하루였다. 오후 세 시쯤 됐을까,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후드득 빗발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우비를 챙겨 입을 틈도 없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소금밭에 뛰어들었다. 서둘러야 했다.
고여 있는 바닷물에 순백의 꽃을 피우기까지는 꼬박 20여 일이 걸린다. 그 긴긴 기다림의 시간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빗속을 뚫고 해주(海宙)에 소금물을 가두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염부들은 이 작업을 ‘비몰이’ 혹은 ‘비설거지’라고 한다. 날카로운 한낮의 뙤약볕보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가 그들을 더 힘들게 한다. 그나마 요즘은 양수기로 물을 대 작업이 수월해졌지만, 15년 전만 해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릴없이 수차를 돌려야 했다.
“새벽 두 시든 세 시든, 비가 오면 염전으로 바로 뛰쳐나가야 해요. 그럴 때가 가장 안쓰러워요. 한두 방울이라도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놀라서 깨곤 해요.”
김순안(57) 씨의 아내 홍경신(48) 씨는 또 그대로 속병을 앓았다. 소금 만드는 일을 ‘하늘이 내리는 농사’라고 하지 않던가. 그날그날의 비바람과 햇살에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하는 건, 염부의 아내로서 안고 살아가야 할 숙명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릴 즘,
새하얀 소금꽃도 수북이 쌓여간다.



기다림도 행복인, 염부의 삶
이날 염부들은 하루 일을 조금 일찍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고 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해주 안에 가둬놓았던 소금물을 결정지에 올리는 작업이 이른 아침부터 이뤄졌다. 염부 네 명이 꼬박 세 시간에 거쳐 구슬땀을 흘렸다. 햇살이 살차게 쏟아지고 결정지가 뜨끈뜨끈하게 데워지면, 소금꽃이 활짝 피어날 테다.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작이다.
염부들이 잠시 일손을 놓고 숙소 한편에 두런두런 모여 앉는다. 대충 숭숭 썰어 낸 쑥떡 한 접시, 김치 한 보시기, 막걸리가 놓인 상이 금세 차려졌다. 술상이랄 것도 없이 조촐하지만, 육체의 고단함을 씻어 내기엔 충분하다. 막걸리 몇 순이 돌자 얼근얼근 취기가 오른다. 세상 고민이 무엇이랴, 불그스름한 염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힘들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얼마나 재미있다고. 하늘의 뜻에 맡기면 그만이야.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또 쉬고,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마음 편히 사는 거야. 몸도 그리 고되지 않아. 이 봐. 이 나이에 얼마나 건강해.”
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비바람도 뙤약볕도 아닌 사람이다. 작년 이맘때에는 일꾼 두 명이 갑자기 그만두어 132천231㎡(4만 평)에 이르는 염전을 단 두 사람이 책임져야 했다. 검게 그을린 팔뚝과 그 아래로 뻗은 두꺼운 손등이 그간의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할아버지는 괜찮다지만, 소금보다 더 짠 땀을 흘려야 하는 ‘극한 직업’이다. 그래서 그는 2년째 곁에서 함께 하고 있는 후배 윤정범 씨가 형제처럼 각별하게 느껴진다. 올 3월, 염전으로 온 막내 나병만 씨도 애틋하기는 마찬가지다. 일하면서 이렇게 젊은 사람은 처음 봤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윤 씨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정년퇴직 후 집에서 쉬려니 몸과 마음이 갑갑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한창때처럼 일할 자신이 있었다. 교편을 잡던 손으로 고무래를 들고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몸을 쓰다 보니 몸도 마음도 더 젊어졌다. 몸무게도 8킬로그램이나 줄었다. 나 씨는 하던 사업을 정리하면서 염부의 삶을 살게 됐다. 가족은 걱정했지만, 건강한 몸으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햇살과 바람 머금은 순수하고 견고한 결정체.


시간의 땀방울로 빚은, 순백의 결정체
오후 다섯 시경, 기다리던 소금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기 시작한다. 염부들의 일손도 다시 바빠진다. 아직 따가운 햇발 아래서 염부들이 소금을 정성껏 그러모은다. 바닷물 머금은 광산에서 고무래질을 거듭할수록 새하얗게 빛나는 보석이 쏟아져 나온다. 그 보석이 수북이 산을 이루자, 외발 수레에 그득 담아 창고로 옮기는 작업이 이어진다. 물에 흠뻑 젖은 소금은 한 수레에 90킬로그램이 넘는다. 결정지와 창고 사이를 수십 번 오가야 하지만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시간의 땀방울이 빚어낸 결정체가 허름한 창고에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 간다.
“이 섬에서 난 소금은 달고 맛있기로 유명해. 전국 각지 안 가는 데가 없어. 또 봐봐 얼마나 깨끗해. 사방이 자연이니, 불순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어. 이 땅 주인하고도 약속했어. 나 죽고 나서도 염전을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강성식 할아버지는 40여 년을 염부로 살아온 자신이 자랑스럽다. 건강하게 땀 흘려 육 남매 모두 대학에 보내 훌륭히 키워내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아왔다. 또 지금은 사라져가는 천일염 만드는 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 않는가. 평생 소금밭을 일구느라 까맣게 그을린 할아버지가 소금꽃처럼 새하얗게 웃는다.



노을이 번지고 있다. 하얗게 빛나던 소금이 불그름히 물들어 간다. 염전에 고인 바닷물에도 노을빛 고운 하늘이 잠긴다. 그 위로 염부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세상의 빛이 사그라져도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소금 만들기에 집중했다.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그 땀으로 빚어낸 결정체는 순수하고 견고하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칠십 평생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늙은 염부의 뒷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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