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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진 돌산에 심은 가톨릭 정신
화도진 돌산에 심은 가톨릭 정신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기념 사진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여섯 번째로 인천대건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동춘동 현재의 교정

김대건상
설립자 이창흠은 일제 말기 3년간 인천공립공업학교(현 인천기계공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정책에 울분을 토하면서 한국인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온갖 박해를 이겨내며 인천영화학원을 운영해 온 내리교회 교단과 협의해 학교 설립 기성회를 결성했다. 장차 영화 교단 안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까지 운영하리라는 벅찬 희망을 함께 안고 출발한 것이다. 교명도 내리교회가 1903년에 신식학교를 설립하면서 ‘영생교화’라는 말에서 따온 ‘영화’라는 이름을 넣어 ‘인천영화중학교’로 지었다.
1946년 10월 22일 2개 학급 120여 명의 학생과 6명의 교사로 학교 문을 열었다. 입학식이 열린 곳은 내리교회당이었다. 신입생 선발고사도 내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학교에서 실시했다. 학교는 당시 적산이었던 도시바 전기회사의 기숙사 건물과 현 만석초등학교 자리에 부지를 마련했다. ‘대건(大建)’의 씨앗인 인천영화중학교가 그곳에 심어졌다.
개교한 지 얼마 안 돼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적 치하 60일의 상처를 극복하고 황폐한 교정에 모였던 200여 명의 학생과 교사들은 한 덩이가 되어 학원의 재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1953년 중학교 6년제에서 고등학교 3년제가 분리 운영되는 학제 개편이 실시되었다. 이때 인천영화고등학교가 병설되어 6학급 인가를 받았다. 설립 당시에도 비좁았는데 고등학교까지 들어서자 한계를 느껴 새 교사를 마련하게 되었다.
인근 돌산을 매입해 교사 증축에 착수하였다. 이 야산은 바로 옛 화도진 터였다. 전쟁의 피폐 속에 화도진의 흔적은 하나도 남은 게 없었고 주변은 엉망이었다. 잡목만 듬성듬성한 야산의 둘레에는 전란을 겪은 이재민과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의 무허가 판잣집들이 난립해 있었다. 비탈진 북편 언덕을 매입해 교지 정지 작업을 하는 한편 본관 건물인 목조 2층 건물 건축에 착수했다. 인천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제2기갑부대의 중장비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학교 운영재단은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이관되었고 다시 곧바로 인천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이 학교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됨으로써 명실 공히 가톨릭 미션 학교로서 참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 대건중학교는 제 40회 졸업식을 끝으로 9천52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문을 닫으면서 고등학교 단일체제로 나갔다. 대건고는 1998년 화수동 시대를 접고 동춘동 봉재산 품에 안겼다. 현재까지 ‘영화’ 시대를 거치며 1만8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사라진 화도진 터 모습(57년도, 63년도 앨범)
학교를 병풍처럼 둘러싼 이 절벽 산은 옛 화도진 터였다. 잡목만 듬성듬성했던 이 산 주변에는 피란민들의 무허가 판잣집들, 방치된 채 버려진 창고, 엉성한 가내공장 등이 난립해 있었다. 운동장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돌산은 마치 학교의 ‘옹이’와 같았다. 돌산이 가로막는 바람에 운동장 활용이 힘들었고, 교문에서는 본관 건물이 보이지 않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틈나는 대로 이 돌산을 깨부쉈다. 수십 년이 지난 1972년에야 겨우 앓던 이 빠지듯 없어지게 된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화도진 터가 그때 크게 훼손된 것이다. 100여 년 전 화도진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으며, 제물포(현 중구 일대)로 통하는 한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화도진은 지난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花島鎭圖)’를 토대로 복원됐다.

사라진 원통형 기상대 건물(64년도)
일제는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관측 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당시 이 측우소는 만주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했고 일본 기상대,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 후에 세워진 하얀 원통형 건물은 인천기상대의 상징이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이 건물을 기상대 측은 문화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2012년 소리 소문도 없이 철거했다.

단체 관람 인천극장(63년도)
대건고에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은 인천극장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단체 관람하기 위해 학생들이 줄지어 있다. 인천극장은 당시 중심가였던 동인천 가까이에 있었지만 삼류 취급을 받았다. 한때 불량배가 많기로 소문난 극장이었다. 1955년 3월 연극 전문극장으로 개관하였는데 이듬해 1956년 4월 24일 화재가 나 전소되었다. 1960년대 시민극장에서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오다 2001년 9월에 문을 닫았다. 현재는 작은 마트가 자리 잡고 있다.

자유공원 시절의 시립박물관(64년도)
1946년 4월 1일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옛 세창양행 사택 자리(현 맥아더 동상)에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했다.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의 막이 오른 것이다. 1953년 지금의 제물포구락부 자리에서 재개관했으며 자유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단골 방문 코스였다. 정문 앞에 있는 커다란 향로가 인상적이었다. 1990년 5월 4일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했고 지난 4월 1일 개관 70주년을 맞았다.

60년대 화수동 일대 모습(64년도)
가톨릭 미션스쿨답게 종교 행사가 자주 열렸다. 성체를 모시고 성당 밖을 행렬하는 행사인 ‘성체거동(聖體擧動)’ 의식에 참여한 학생들과 신자들의 모습. 60년대 화수동 일대의 풍광이 렌즈에 고스란히 잡혔다.

59회 인천전국체전(78년도)
14년 만에 인천에서 두 번째 열린 체전(1978년)이다. 각종 불상사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모범체전이었다. 59회 전국체전은 ‘국화체전’으로도 기억된다. 거리마다 5만 그루의 국화화분이 투입돼 시내 전체가 국화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당시 많은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취업하러 간 세태를 반영하듯 처음으로 재(在)사우디아라비아 선수단(임원8, 선수18)이 참가했다. 성화 최종 주자는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인천의 아들 장창선이었다.

1. ‘임해(臨海)’라는 단어는 ‘바다에 가까이 있다’라는 의미로 한때 임해공업단지, 임해관광, 임해도로 등의 말이 흔하게 사용되었다. 대건고의 ‘임해교실’은 1968년 처음 시도해 1970년대까지 해마다 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영어회화 합숙 훈련(English Language Camp)’으로 실시되었다. 미국 평화봉사단 젊은 남녀 학생들이 함께 참여해 영어회화를 지도했다. (70년도)

2.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19 의거 기념식에 참가한 대건고. 플래카드에 ‘상기하자 4·19 정신, 바로잡자 민족정기’라고 적혀 있다. (64년도)
3. 초기 영화학원은 운동부 등 특별교육에 큰 비중을 두었다. 특히 레슬링은 경기도 내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1970년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레슬링의 패권을 차지한 선수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훈련 장면이 거의 묘기대행진 수준이다. (64년도)

4. 문화 시설과 프로그램이 빈약했던 시절, 그나마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은 ‘문학의 밤’이란 타이틀로 예술제를 여는 교회와 학교였다. ‘낙엽 지는 하이얀 밤의 향연’이란 이름의 예술제가 열린 날, 금녀(禁女)의 남학교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초청되었다. (66년도)

5. 한때 체력장(體力章)은 필수 교과였다. 1972년부터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체력장을 실시하였다. 종목은 윗몸앞으로굽히기, 윗몸일으키기, 왕복달리기, 턱걸이, 던지기, 도움닫기멀리뛰기, 100m달리기, 오래달리기 등이었다. 그 때 체육 선생님들의 위상은 최고조였다고 볼 수 있다.(76년도)

6. 송도해수욕장은 단골 소풍 장소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점심 먹고 진행되는 반별 장기자랑. 비록 백사장 뙤약볕 아래의 노천 무대였지만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그날도 또 한 명의 교내 ‘스타’가 탄생한다. 소풍의 단체복은 늘 교련복이었다. (82년도)

7. 1962년 운영 재단이 인천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이관했다. 교명은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본관 중앙 현관 베란다 위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상(像)을 세웠다.(75년도)

배 타고 간 강화여행
6, 70년대 인천 시내 학교의 수학여행 단골 코스는 강화도였다. 당시 강화도는 육로가 없어서 1970년 강화교가 개통될 때까지 배로 다녔다. 강화 가는 배는 ‘황보호’ ‘갑제호’ 등이었다. 인천역 뒤 부두에서 떠나 동검도 앞을 지나 초지리(초지진)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전등사 아래 마을까지 걸어가서 여장을 풀었다. 마니산 참성단 제단 위까지 올라간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단군 할아버지가 ‘예끼, 이놈들’ 하고 호통을 치지나 않으셨는지. 제단 옆의 소사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그곳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58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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