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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정확함은 미덕 아닌 ‘의무’

2016-09-07 2016년 9월호


역사학에서 정확함은 미덕 아닌 ‘의무’


 
글 남달우 (사)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역사학에서 정확함은 의무이지 미덕이 아니다.” 영국의 고전학자 Alfred Housman(1859~ 1939)의 말이다. 이에 대해 E. H. Carr는 그의 저서 「What is History」 가운데 「역사가와 사실」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 정확함은 필요 조건이지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역사가를 정확하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썼다고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고 풀이했다.
그런데 ‘인천’을 이야기할 때마다 ‘인천의 정체성’에 매몰되어 정확함을 무시하는 경우를 필자는 종종 보아 왔다.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가 ‘미추홀국’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18년으로 단정하는 경우이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는데 열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하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두르고, 동은 높고 큰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기름지고 윤택함이 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혀있어 그 천연적인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을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익(輔翼)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니,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거처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드디어 참회하여 죽었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는데,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라고 고쳤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에 실려 있다. 여기서 미추홀국의 건국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
중국의 한나라는 왕망(王莽)의 신(新·서기 8~23)을 가운데 두고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전한의 성제는 기원전 32년 즉위하여 건시(建始), 하평(河平), 양삭(陽朔), 홍가(鴻嘉), 영시(永始), 원연(元延) 등의 연호를 썼다. 온조가 건국한 십제의 건국 연도를 알 수 있는 연호인 홍가는 기원전 20년부터 기원전 17년까지가 된다. 즉 홍가 1년이 기원전 20년이다. 그러므로 온조가 십제를 건국한 전한 성제 홍가 3년은 기원전 18년이다. 그런데 비류는 온조가 십제를 건국하기 전에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국가의 건국은 하루아침에 될 수 없으므로 미추홀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18년 이전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자로에게 “내가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논어」 위정편)”라고 하였다. 역사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빈약한 상상력으로 역사를 괴롭힐 뿐이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홀로 있을 때 삼가라.”         「대학」 6장
나 자신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착한 척을 하나, 보지 않는 곳에서는 못하는 짓이 없다.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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