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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 전 선비가 걷던 길,‘오늘’ 걷다

2016-11-02 2016년 11월호



110년 전 선비가 걷던 길, ‘오늘’ 걷다

가을, 수더분한 땅 빛 좇아 강화로 간다. 강화대교 건너 선원사를 지나면 아담한 시골 마을에 이른다. ‘심도기행’을 쓴 화남 고재형 선생이 태어난 두두미 마을이다. 화남의 후손 고승권 씨와 함께 마을 길을 걸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화남 생가 가는 길 거리 18.8㎞ 소요시간 6시간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눈에 들어오네.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 씨 탁상에서,
잔 가득한 술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斗頭我步帶春風
一府山川兩眼中
明月綠楊諸具榻
滿杯?味使人雄
- <심도기행> 중에서 ‘두두미동(頭頭尾洞)’



화남 생가 근처에서 화남의 5세 종손인 고승국 교수의 노모를 만났다.

110년 전, 옛 선비가 걷던 길

병오년(1906년), 때는 봄이었다. 한 선비가 행장을 꾸려 말에 싣고 길을 떠났다. 선비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고향 강화 일주에 나섰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예순이 넘은 선비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겨졌을 것이다.
선비는 자신이 태어난 두두미 마을에서 출발해 바닷가 성곽에 오르고 옛 궁궐터를 지나 큰 나무 아래서 숨을 고르며, 시간이 고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천 리 길, 강화 100여 마을을 둘러본 끝에 한시 칠언절구 256 수를 짓고 시집 <심도기행>을 남겼다. 심도(沁島)는 강화의 또 다른 이름, 선비는 화남(華南) 고재형(1846∼1916) 선생이다. 선비가 걸었던 길은 110년의 시간이 흘러 ‘강화 나들길’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도 매년 4월이면 고 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

화남 생가 있는, 고 씨 집성촌

깊어가는 가을, ‘밝은 달 아래, 푸른 버들 피던’ 강화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로 간다. 나들길 6코스를 걷다 보면 다다르는 마을은 화남의 생가가 있는 고 씨 집성촌이다. 현재 고 씨 집안 13가구를 비롯해 60여 가구가 오붓이 살아가고 있다. 화남 선생의 후손 고승권 씨가 그 길을 함께했다.
“<심도기행>을 우리말로 옮긴 김형우 교수님께서 책을 직접 건네주셨어요. 고재형 할아버지께서 표현하신 바와는 큰 차이가 있을 거라며 부끄러워하셨지요. 겸손하신 거죠. 할아버지께서 시로 읊은 110년 전 강화의 아름다움을 오늘 되살려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에요.”
마을 입구에 이르자, 새들이 낯선 인기척에 놀라 소란스레 지저귄다. 고른 한낮 탱자나무 위에서 한참을 놀던 참새들이다. 도심과는 마시는 공기도 보이는 풍경도 들리는 소리도 다르다. 하지만 어느새 이 순박한 시골 마을에도 도시의 각박함이 스며들었다. “전에는 자유롭게 드나들던 곳인데, 언젠가부터인가 마을 곳곳에 울타리가 처졌어요. 안타까워요. 도시에서 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이 사유지라는 표시를 하는 거죠. 본인도 지나는 사람도 다 불편할 텐데….”


표지 하나 없는 화남 생가(왼쪽).
나들길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로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흐르는 역사

그래도 마을엔 발길 닿는 곳마다 옛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한가운데는 600살 먹은 느티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 나이 든 나무는 마을의 길고 긴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아 왔을 것이다. 구불구불 흙길을 걷다 보면 마을 동쪽 끄트머리에 작은 우물터가 나온다. 고려 시대 시인 백운(白雲) 이규보 선생이 이 물을 마시고 ‘꿀 우물’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여기서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전 물놀이를 했어요.” 하지만 이제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은 없다.
천천히 거닐던 발걸음은 효부 정려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부모를 지극히 모신 효부에게 내리는 정려문은 지금은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이다. 효성 깊은 고 씨 집안의 며느리 평해 황 씨가 살던 기와집은 지금 2층 양옥집이 됐다. 가까이에는 고 씨 집안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가는 길에는 행운을 상징하는 클로버가 초록 융단처럼 깔려 있다. “제가 어릴 때 지은 사당이에요. 건물 지을 때 목수들이 우리 집에서 자고 그랬어요.” 지금도 매년 4월이면 문중 사람들이 모여 사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하지만 고 씨는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이제 곧 전통이 사라져버릴 거라며 말끝을 흐렸다.
스쳐 지나갈 뻔했다. 무성하게 자란 수풀 사이로 화남의 생가가 보인다. 그 흔한 표지 하나 없다.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낡은 집 슬레이트 지붕 위로 세월의 먼지만 하염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마을의 긴긴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600살 먹은 느티나무



고운 꽃무늬 옷을 입고 배추를 곱게 가꾸던 전개남 할머니


오늘 그리고 내일 걸을 역사의 길

“뉘 집 사람이지? 잘 모르겠네?” 평상에 앉아 볕을 쬐던 어르신 두 분이 낯선 외지인에게 말을 건넨다. “가을이면 두두미 마을이 예쁘다고 해서 촬영 왔어요.” “아 그래서 일섭이네 아버지랑 같이 다니는구나. 어디 ‘케이비에스’에서 나왔어? ‘피알’하러 왔구나” 두두미마을이 고향인 전개남(84) 할머니는 지금 송도국제도시에 살고 있다. 지난봄에 심어놓은 배추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피러 오늘 아침 마을에 왔다. “올가을에 김장해 먹어야지.” 아기 몸통만큼 자란 배추를 보며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전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어르신은 한사코 촬영을 사양했지만, “온 김에 포도나 먹고 가라”며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따스한 정이 흐른다.
햇살의 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어느새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겉으론 그저 시골 동네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면서 면면히 이어져온 마을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110년 전 옛 선비가 걷던 그 길을, ‘오늘’ 깊어가는 가을을 벗 삼아 걷고 또 걸었다.

※ 나들길 6코스는 총 18.8㎞로 걸으면 6시간 정도 걸린다. 강화풍물시장에서 시작해 논길, 숲길 그리고 화남 생가가 있는 두두미 마을을 지나는 코스로 한가로이 걷기 좋다. 문의 강화 나들길 www.nadeulgil.org 934-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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