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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더 찬란한 ‘동녘빛’

2016-11-08 2016년 11월호



날이 갈수록 더 찬란한 ‘동녘빛’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 기념 사진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열한 번째로 동인천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동인천고 ‘개교 33년사(史)’의 학교 연혁 첫 줄에는 1940년 설립한 ‘인천공업직업학교’가 적혀 있다. 그 뿌리를 근간으로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가 설립되었고 이후 학교는 1951년에 인천공업고와 동인천중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동인천’이란 학교명이 처음으로 인천 교육계에 등재된다. 당장 마련할 수 없는 교실은 그대로 공업고등학교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다.
1956년 도화동 부처산 아래(옛 동인천고 부지) 화교들이 농사짓던 밭 터에 정식으로 ‘동인천 배움터’의 씨앗을 심게 된다. 1961년에 동인천중학교의 병설 고등학교가 인가되었고 마침내 ‘동인천고’는 당시 중학교 건물 일부를 빌려 2학급으로 개교한다. 그해는 4·19 학생 혁명 1주년이 되는 해이며, 바로 이어서 5·16이 일어나는 등 학교 문을 열자마자 격동의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동인천고는 이에 흔들리지 않고 매년 학급수와 교실을 늘려갈 정도로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마침내 1968년도에 도화동 교사의 모습을 대부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 동인천고는 특별히 전인교육에 힘썼다. 축구반, 기계체조반, 정구반, 주산반, 서도반, 문예반, 수학반, 웅변반, 사진반, 시사반, 위생반, 원예반 등 무려 20개의 특별활동반을 운영했다. 특히 개교와 함께 창단된 동인천고 야구부는 강팀 동산고·인천고와 각축을 벌였다. 전국 대회와 4대 도시 대항 야구 경기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는 등 신흥 명문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 질적, 양적으로 괄목할 성장을 거듭하던 중 예상치 못한 ‘성장통’을 심하게 겪게 된다. 학교 부지 전 소유주와의 복잡한 계약관계가 말썽이 되었다. 소유주는 자신의 소유 지분에 해당하는 땅을 학교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한창 교세를 확장해 가던 선인재단 측에 팔아 넘겼다. 급기야 운동장 대부분에 줄이 쳐지고 일부 교실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이 분쟁은 20여 년간 동인천고 발전의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골리앗 같은 선인재단 아래에 위치한 동인천고의 모습은 왜소함과 초라함 그 자체였다. 이에 따른 학생들의 자존감은 결코 가볍게 간과해 버릴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동인천고는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새로운 웅비의 터를 찾아 나섰다. 드디어 1988년 3월 만수동 만월산 남동쪽 기슭에서 동인천고 재도약의 첫 삽을 떴다. 같은 해 12월 27일 고난의 부처산 시절을 접고 희망의 만월산 시대를 힘차게 열었다. 만월산에서 떠오르는 ‘동녘빛(교지 이름)’을 더 찬란하게 받고 있는 동인천고(교장 이병욱)는 그동안 2만 3천여 명의 동량을 배출했다. 


경인선 전철 착공(72년도 앨범)
1971년 4월 7일 경인전철이 착공되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축하공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19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가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온다는 소식에 구름 관중이 모였다. 경인전철은 이날 착공해 74년 8월 15일에 개통했다.


동인천역 광장 미풍(68년도 앨범)
동인천역 주변이 인천 상권 최고조였던 70년대 초 큰 건물마다 대형 광고판이 세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미원’ 네온 광고판이 빛을 발했고 이에 질세라 건너편 빌딩에 후발 조미료 업체인 ‘미풍’의 광고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업체의 현대식 네온 광고판의 경쟁적인 불빛으로 역 광장은 한밤중에도 훤했다.     


제물포역 통학생(69년도 앨범)
옛 도화동 교정 시절에는 제물포역을 이용하는 경인선 통학생이 적지 않았다. 주로 부평, 부천 지역에 사는 학생이다. 통학생의 단결심은 그 어느 동아리보다 강했다. 간혹 다른 학교 통학생들과 ‘열차 결투’가 벌어지곤 했다. 철로변 옆에 초가집들이 줄지어 있다.


‘소풍단골’ 송도유원지(69년도 앨범)
인천에서 중고교를 다녔다면 누구나 송도유원지로 한두 번 소풍을 다녀왔을 것이다. 오전엔 인공백사장과 호수 주변을 왔다 갔다 하다가 점심에 도시락을 까먹는다. 이후 야외음악당에 모여 반별 장기 자랑을 하는 게 소풍의 일정이었다. 선글라스 쓴 ‘리드보컬’과 그룹사운드, 이어서 ‘춤꾼’들에게 점령된 무대, 그리고 그늘에서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선생님….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 풍경이다. 유원지 안은 바뀐 게 별로 없는데 정문의 모양은 자주 바뀌었다. ‘Songdo Resort(송도 리조트)’라고 쓴 영문 간판이 이채롭다.     


맨손체조(62년도 앨범)
보건 환경이 열악하던 시절, 체조는 건강 유지에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학교는 물론 공장 심지어 가정에서도 할 수 있도록 라디오를 통해 체조 음악이 정기적으로 나왔다. 학교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숭의동 진로아파트 부근의 야산을 아무런 건축물 없이 계단식으로 조성해 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공설운동장 스케이트장(67년도 앨범)
인천 공설운동장은 겨울철이 되면 물을 채워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했다. 종종 빙상경기 대회가 열리거나 선수들의 연습 때문에 정오가 넘어 입장이 허용되곤 했다. 한창 타다 보면 기온이 올라가 물 반 얼음 반 진창 얼음판이 되곤 했다. 교복에 (여자 친구가 짜준)털실모자 정도 써야 스케이트 좀 타는 오빠의 그림이 완성된다.


차이나타운 중산학교(69년도 앨범)
북성동 차이나타운에 요즘처럼 춘장 볶는 냄새가 진동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80년 대까지만 해도 대낮에도 음산하고 한적했던 중국촌이었다. 화교학교 중산학교만이 100년의 세월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시민의 날, 항도제(69년도 앨범)
시민의 날은 한때 ‘6월 1일’이었다. 인천항의 실질적인 개항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공계의 제안에 따라 1968년부터는 ‘항도제(港都祭)’를 겸해서 치렀다. 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시민의 날 행사에 ‘입추의 여지’ 없는 관중이 모였다.  



1 국기 하강식은 모든 예의를 다해서 신성하게 진행해야 한다. 밴드부 나팔수들이 매일 ‘생음악’으로 연주했다.(68년도)


2 졸업식 풍경도 많이 변했다. 당시는 종이꽃을 목에 칭칭 휘둘러야 주인공 티가 팍 났다.(68년도)


3 훈남 오빠들로 구성된 학생회. 늠름한 모습이 요즘 군복무 마친 30대에 버금 간다.(68년도)


4 정기 신체검사 중 한쪽 눈을 물컵으로 가린 시력 검사.(76년도)


5, 5-1 대입고사의 필수 과목인 체력장. 그나마 이 때문에 당시 학생들의 체위가 향상되었다는 주장도 있다.(78년도)


6 과도기의 교복 착용 혼재. 동복을 입어야 할 시기에 아직 하복을 착용한 것인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다.(68년도)         

   
7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어머니들의 외출복은 한복이었다. 자식의 대학진학 상담을 하러 오신 어머니들은 가장 좋은 외출복, 한복을 입고 오셨다.(76년도)


8 바둑 삼매경에 빠진 학생들과 훈수꾼들. 저들은 가까운 미래에 사람과 ‘인공지능’이 대국을 펼칠 것을 한 수 앞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65년도)

 

전국 돌풍을 일으킨 ‘인천 제 3의 야구부’
1962년 개교 즈음에 동인천고 야구단이 창단했다. 기존의 인천야구 틀을 깨겠다는 도전적인 발상이었다. 당시에는 ‘야구’ 하면 으레 ‘인고’ ‘동산고’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동인천고 야구단은 동인천중 출신 13명으로 구성된 ‘미니팀’으로 출발했다. 여차하면 3루수가 투수 마운드에 서야 했고 외야수가 포수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63년과 64년 연이어 황금사자기대회 때 인천고와 동산고를 지역예선에서 격파하고 본선에 오르는 등 전국 고교야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예산 부족 등으로 창단 7년 만인 1968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 뒤로 동문회와 재학생을 중심으로 한 야구부 재건을 위한 노력에 힘입어 잠시 재창단되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적되는 야구부 재정적자와 스카우트 문제를 넘지 못하고 다시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야구부 선수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심석종합고등학교로 전학 갔다. 오늘날까지 동인천고 동문회가 가장 아쉬워하는 역사의 한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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