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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石花처럼, 거칠고 단단한 어머니의 세월

2016-12-07 2016년 12월호


석화石花처럼, 거칠고 단단한 어머니의 세월

바다는 주인이 따로 없다. 땅을 잃은 사람들은, 바다가 공짜로 내어준 석화(石花) 밭에서 차디찬 바람 맞고 갯벌에 뒤엉켜 억척스럽게 삶을 일궜다. 6·25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허리가 굽도록 갯벌에서 ‘쪼새’를 두드리고 굴막에서 칼질을 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오늘도 밤새도록 단단한 석화 껍데기 속에서 뽀얗게 영근 삶의 희망을 캔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북쪽 땅 떠나, 남쪽 바다로

이른 아침,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의 ‘굴막 공동 작업장’. 해마다 굴 철이면 이 동네 아낙들의 손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다. 오늘은 새벽 3시에 일을 시작해 오전 10시까지 꼬박 굴을 깠다. 어제 바다에 폭풍 주의보가 내린 탓에 물건이 없어 그나마 작업이 일찍 끝났다.
“올해는 굴이 안 좋아요. 뽀얀 우유 빛깔이어야 하는데 멀겋잖아.” 허리 한번 펴지 않고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굴을 까던 아주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비도 오고 태풍도 불어야 굴이 잘 여무는데, 올해는 날이 가물어 알갱이가 도통 실하지가 않다. 인천에는 영종·용유도와 무의도 일대에서 굴이 많이 난다. 따로 씨조개를 뿌리지 않아도 용케 갯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자란다.
“한입 잡숴봐.” 작업장에서 대장으로 통한다는 어르신이 칼로 굴을 척 베어 입안에 넣어 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훅 끼친다. “덜 영글어서 짜긴 하지만, 그래도 몸에 들어가면 좋아. 양식 굴 먹고 탈 난 사람은 봤어도, 인천 굴 먹고 탈 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올해 바다농사는 영 시원치 않지만, 그래도 자연이 키워낸 인천 굴만 한 게 어디 있으랴.


공동 작업장이 생기기 전, 주민들은 골목 길바닥에 비닐 천막을 치고 굴을 깠다.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굴막 공동 작업장’


만석 부둣가에서 만석고가 밑으로

굴막 공동 작업장이 생기기 전, 주민들은 차디찬 골목 길바닥에 비닐 천막을 치고 굴을 깠다. 만석 부둣가 굴막에서 작업하기도 했다. “만석부두 조선소 담벼락 앞에 굴까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어요. 갯벌이나 섬에서 굴을 캐 와 그 안에서 바로 껍데기을 까서 내다 팔았어요.” 변옥자 씨가 옛 기억을 더듬는다. 만석 부둣가 굴막은 30여 년 전에 하나둘 만들어졌다. 거적때기라도 하나 깔고 판자를 대어 지어 놓으니, 굴을 깔 때 추위가 한결 덜했다. 한창때는 40여 집의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공장 담벼락에 가까스로 기대어 있던 굴막들은 지금 스러지고 없다.
이제, 굴 까는 풍경은 만석동 고가 밑에서 볼 수 있다. 이 일대에는 알루미늄 새시로 번듯하게 지어놓은 굴막 20여 곳이 줄지어 있다. ‘만석동 굴 직판장’이라고 쓴 안내판도 버젓이 있다. ‘2번 굴막’에서 장사하는 김선비(76) 할머니는 아홉 살에 황해도에서 피란 내려와 열다섯 살에 인천으로 옮겨왔다. “고생 많이 했어요. 굴 깐 지 50여 년 됐는데, 이것 말고도 안 해본 일이 없으니까. 그래도 당시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나. 전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가운데서도 굴을 깠는데, 지금은 이렇게 연탄도 때고 얼마나 좋아.” 50여 년 손이 부르트도록 굴을 만지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 그 덕에 딸 넷 아들 하나 훌륭히 키워내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아왔다. 할머니가 투박한 손길로 칼질을 할 때마다 싱그럽고 탐스러운 굴이 맨살을 드러내며 바구니에 척척 담긴다. “신포동에서 갈비집을 하는 딸네 갖다 줄 거야.” 할머니의 깊게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김선비 할머니는 50여 년 손이 부르트도록 굴을 쏟아내며, 딸 넷 아들 하나 훌륭히 키워냈다.


만석 고가 밑, 만석동 굴 직판장

오십 년, 굴을 캐고 까고 팔던 삶

오늘은 오후 네 시쯤 굴을 실은 배가 들어온다고 했다. 쌍용기초소재 공장의 긴 담장을 따라 땅 끝자락에 있는 만석부두로 향했다. 저 멀리 작은 배가 뱃고동을 울리며 뭍으로 달려오고 있다. 오늘 아침 일곱 시에 무의도로 떠났던 ‘88한일호’가 아홉 시간 만에 만석부두에 닻을 내렸다.
배에 탄 사람들은 종일 석화 밭에 쪼그리고 앉아 시린 갯바람 맞으며 굴을 따 모았다. 이제 힘겹게 모은 굴을 배에서 내려야 한다. 아무리 뱃사람이라도 대부분 60, 70대 노인인 이들에게 한 포대에 80킬로그램이 넘는 굴 포대를 내리는 일은 힘에 부친다. 두 시간째 배에서 굴을 내려 차에 싣는 작업이 이어진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굴 까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나갔다 이제야 들어온 거야. 굴 까서 팔 것 생각하니 벌써 힘들어.” 박순애(72) 할머니가 따온 굴을 손질하면 딸이 화수 시장에 내다 판다. 아무래도 장사치에게 굴을 넘기는 것보다 온 가족이 나서야 이문이 남는다. 할머니 역시 전쟁을 피해 황해도에서 멀리 이곳 만석동까지 왔다. 이후 줄곧 바다 곁을 떠난 적이 없으니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차디찬 갯바람 맞으며 진흙에 뒤엉켜 살아온 세월이었다.
한평생 서쪽 바다에 핀 석화(石花) 밭에서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 온 사람들. 그들은 오늘도 단단한 석화 껍데기 속에서 뽀얗게 영근 삶의 희망을 캔다. 만석동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건네준 말캉한 굴의 감촉이 떠오른다. 짭조름한 바다 향이 아직도 입안에 맴돈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나갔다 이제야 들어온 거야.”
박순애 할머니가 따온 굴을 손질하면, 딸이 화수 시장에 내다 판다.


배가 들어와도 끝이 아니다. 80킬로그램이 넘는 굴 포대를 내려 차에 싣는 작업이 두 시간 째 이어졌다.


※ 괭이부리마을 ‘굴막 공동 작업장’과 만석동 굴 직판장에 가면 귀한 자연산 인천 굴을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1 킬로그램에 1만 5천 원 선. 철에 따라 다르다. 괭이부리마을 굴막 공동 작업장 동구 화도진로 186번길 28호 만석동 굴 직판장 남포 상회 북성동 1가 1번지 28호, 772-8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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