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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추억이 노릇노릇 익어가다
2017-01-04 2017년 1월호
겨울밤, 추억이 노릇노릇 익어가다
소박하고 특별할 것 없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맛. 전국 방방곡곡마다 입맛 당기는 먹을거리 천지지만, 인천에는 추억을 녹여 그리움으로 마시는 뜨끈한 한 그릇이 있다. 추억보다 진한 인천의 맛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 첫 번째로, 한겨울밤 추억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동인천 삼치거리를 찾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골목에 들어서면 지글지글
생선 굽는 냄새가 지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버려진 생선, 귀한 안주로
인천시민 가운데 소싯적 동인천에서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동인천 뒷골목의 삼치거리에서도 생선구이에 막걸리 얼큰하게 얽힌 추억 한 접시쯤은 가지고 있을 게다. 동인천역에서 대한서림을 지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앞의 동인천 삼치거리에 이른다. 골목에 들어서자 지글지글 생선 굽는 냄새가 지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골목의 역사는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홍재남 선생은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란 와 동인천에 터를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인천 막걸리 ‘소성주’를 탄생시킨 대화양조장이 있었다. 당시 홍 선생은 양조장에서 술독을 닦는 허드렛일을 하고 그의 아내는 식모살이를 하며 힘겹게 삶을 꾸렸다. 그러다 부부는 양조장 앞에서 밥장사를 시작했다. 일꾼들은 끼니때가 되면 막걸리를 들고 밥집을 찾았는데, 부부는 가난한 손님들이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연안부두에서 버려지던 뉴질랜드산 생선 ‘바라쿠다’를 주어다 튀겨 내놓기 시작했다. 삼치거리 사람들은 이 생선을 ‘몽둥이 삼치’라고 부른다. 몇 동강을 내어도 한 토막이 어른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크니 몽둥이라 부를 만하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
재료는 초라했지만 부부가 파삭하고 졸깃하게 튀겨낸 삼치구이 맛은 최고였다. “1976년에 삼치와 막걸리를 250원 내고 먹은 기억이 있어요. 당시 시흥 신천리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차비까지 탈탈 털어 삼치구이를 기어이 사 먹고 친구를 집까지 걸어서 데려다주곤 했지요. 그만큼 맛이 기가 막혔어요.” 삼치거리에서 ‘양산박 삼치’를 운영하는 김남수(60) 씨가 당시 일을 떠올린다.
1970년대 정부가 탁주 정책으로 인천 양조장을 합치면서 대화양조장이 문 닫자, 부부는 ‘인하의 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를 했다. 부부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와 손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는 날로 번성했고, 골목엔 삼치구이 집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30여 년 전 인천집을 시작으로 본전집, 서민촌, 양산박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는데 원조의 텃세는 애당초 없었다. 오히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며, 장사가 안 되는 집이 있으면 자신의 손님을 직접 그 집으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 다른 집에도 손님이 들 수 있도록 열흘 넘게 가게 문을 닫은 적도 있다.
“난 그분들에게 모든 것을 배웠어요.” 처음 삼치 다루는 법을 몰랐던 초보 장사꾼은 무작정 생선을 찜통에 넣고 쪄냈다. 그 모습을 본 ‘인하의 집’ 부부는 한참을 웃더니, 삼치를 손질하는 법부터 요리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그들 덕분에 지금껏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먹고살 수 있었다. 그 고마운 마음에 김남수 씨는 지금도 가끔 부부의 산소에 찾아가 삼치 한 점 건네고 막걸리 한잔 따라 드리곤 한다.

삼치 한 점 막걸리 한잔에, 정이 깊어가는 밤
‘도란도란 삼치’의 김예숙(64) 씨도 ‘인하의 집’ 어르신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다. 29년 전 이 골목에 삼치 집 ‘서민촌’을 연 그는 요리를 배우는 것부터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넓히는 데도 어르신의 도움을 받았다. “가게에 손님이 한창 많을 때는 앉을 자리도 없었어. 아저씨가 ‘더 넓은 데서 장사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지금의 자리를 알아봐주셨지. 내가 아버지라고 불렀어. 지금도 그리울 때가 많아.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음식 할 줄 몰라 손님이 오면 겁부터 덜컥 내던 새댁에서 어느덧 할머니가 된 그가 주름진 손으로 삼치를 척척 구워낸다. “지금은 음식 하는 건 자신 있어. 사람들이 이 동네에서 우리가 최고래.” 김예숙 씨의 곱게 주름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동인천 삼치거리에는 현재 17개 가게가 성업 중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내산 삼치를 쓰고, 튀기는 대신 굽는 등 요리법이 바뀐 곳도 많다. 옛 추억을 찾아온 사람들은 ‘맛이 바뀌었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집이든 ‘불’보다 더 뜨거운 ‘정’으로 삼치를 구워 푸짐하게 내놓는 인심은 한결같다. 지금도 이곳에선 단돈 1만~2만 원이면 안주 하나로 몇 사람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마음까지 든든히 채울 수 있다.
해가 땅 밑으로 떨어지면 후미진 도심의 뒷골목에도 활기가 인다. 거리엔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가게에선 밤늦도록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한 삼치구이 집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주인장의 야무진 손끝으로 빚어낸 술과 함께 한 상이 차려진다. 뜨끈하게 구워낸 큼지막한 삼치가 먹음직스럽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치 살을 한 점 크게 떼어내 입안에 담는다. 담담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한가득 퍼져 나간다. 여기에 칼칼한 막걸리 한잔 곁들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막걸리 한잔에 삼치 한 점, 그렇게 정이 깊어가고 이 겨울밤이 깊어간다.

삼치 향기를 찾아 동인천역에서 대한서림을 지나 자유공원 가는 길을 오르다 보면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앞에 삼치거리 입간판이 보인다. 그 골목에 삼치구이 집 17곳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가게마다 다르지만 보통 점심시간 때부터 다음 날 새벽 2~3시까지 문을 연다. 모두 한 달에 한 번은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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